조건부문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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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최근 한 외지에 실린 만화를 보고 고소를 금치 못한 일이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잘」왕 어전에 세계의 기라성 같은 거두들이 엎드려 있었다.
「닉슨」·「퐁피두」·「히드」·「브란트」등이 머리를 조아리며 눈을 감고 왕명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23일「아랍」석유수출기구(OAPEC)는 드디어 그 왕명을 대신하듯이 원유 공시가의 1백28% 인상을 발표했다. 이날「이란」의 「팔레비」왕은『싸구려 석유시대는 영원히 끝났다』고 선언했다. 세계석유의 50%를 산출하고 있는 이들 중동 산유국의 일갈은 그대로 세계를 진동시켰다.
국제원유가격은 2차 대전을 고비로 무상한 변화를 거듭해 왔다. 전전엔 미국의「멕시코」만을 기준지점으로 한, 이른바「걸프·코스트」가 일방적으로 가격을 좌우했다. 2차대전이 끝난 1945년엔 중동의「페르샤」만에 새로운 기준지점이 설치되었다. 가격은「걸프·코스트」와 동일했다. 「걸프」원유와 중동원유의 가격을 균등하게 유지해 주는 지점은 양 지역의 등거리에 있는 지중해의 중앙부였다.
그러나 중동이 원유가격을 인상함에 따라 균등화지점은 영국, 혹은「베네쉘라」로 전전했다. 1949년7월엔 중동의 원유가가 인하되면서「뉴요크」가 원유가격의 기준지점이 되었다.
1950년대 초엔 국제원유시장은「세븐·스타」라고 부르는 국제석유독점회사의 과점적 지배체제하에 들어갔다. 원유가격은 원유의 수급에 따른 시장법칙이 적용되고, 이른바「메이저·그룹」은 이익극대화 전략에 따라 그것을 결정했다.
1960년대엔「세븐·스타」의「메이저·그룹」에 대항한 독립계 회사들이 시장에 진출했다. 이들은 새롭고 합리적인 판매방식에 의해 소비자들에게「어필」했다. 「메이저」는 시장지배력을 서서히 상실했다. 원유가격도 따라서 대폭으로 떨어졌다. 「싸구려 석유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자연히 세계의 석유의존도는 증대했다. 미국은 자기나라의 석유들을 버려 두고 중동의 값싼 석유를 수입했다. 72년부터 73년 사이에 미국의 수입석유는 전체의 33%로 늘어났다. 그것의 4분의3이 중동석유였다.
중동의 산유국들은 이런 상황에서 주권의식과「내셔널리즘」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더구나 그들 공동의 적대국인「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에 막대한 양의 석유를 수출하는 것은 그들에겐 다시없는 구실이 되었다.
「달러」의 지배를 받는 모든 나라는 당연히「싸구려 석유」의「에너지」에 의한 문명의 구조를 이루었다. 자동차·화력발전소 등의 기계문명에서「비닐」문명·「아스팔트」등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석유제품이 아닌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값싼「에너지」를 전제로 한 조건부 문명이었다. 중동이 오늘날 그 원유가격을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정치적 무기」로 휘두르는 것은 인류의 원망을 들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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