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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OX 깃발만 드는 한국 언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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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권석천
권석천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석천
논설위원

신(神)은 사소함 속에 존재한다. 미국 건축가(미스 반 데어 로에)의 말이다. 그토록 사랑하던 연인과의 결별도 작은 다툼에서 시작된다. 대형 붕괴 사고도 나사 하나에서다. 한국 언론의 위기 역시 사소해 보이는 것들을 무시해 온 데서 비롯됐는지 모른다.

 지난 9일 서울남부지법에서 방송사 손해배상 판결이 나왔다. “유치원 교사가 원생의 신체를 접촉하는 영상을 두 배 빠르게 돌려 교사가 아이를 때린 것처럼 보도했다.” 방송사 측은 “뉴스는 시간 제약이 많아 부득이하게 편집하는 경우가 많다”고 항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 판단은 이랬다.

 “일부 영상은 반복해 보여주는 편집 방식을 취했으면서도 일부 영상은 시간 제약으로 빨리 재생시켰다고 주장하고 있으므로 그 자체로 모순된다. 설령 방송시간의 제약이 있다고 하여 편집을 통한 사실의 왜곡이 정당화될 수 없다.”(판결문 중)

 아직 항소 절차가 남아 있다. 분명한 건 영상 재생 속도에까지 검증 잣대를 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목, 기사 내용은 물론 전달 방식에도 철저함을 요구하는 시대다.

 그런데도 언론은 ‘야마주의(主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야마? 기사의 주제나 방향을 가리키는 일본식 은어다. 기사를 작성할 때 야마에 맞는 케이스는 살리고, 맞지 않는 케이스는 죽인다. 불가피한 측면은 있다. 언론의 주요 기능 중 하나가 의제 설정이다. 매체의 시각을 선명하게 제시하려면 어쩔 수 없이 취사선택을 해야 한다. 지면과 방송 분량도 한정돼 있다. 하지만 야마에만 집착하는 ‘야마주의’는 사실을 과장하고 왜곡시킨다. 복잡하고 중층적인 현실을 하나의 틀에 끼워 맞추는 것 자체가 무리다.

 그 폐해는 정치의 영역에서 특히 심각하다. 매체 성향에 맞는 정치인 잘못은 눈감아주면서 성향이 다른 정치인에겐 시퍼런 칼날을 들이댄다. ‘종북 대 애국’ ‘독재 대 민주’ ‘친노 대 친박’으로 나누고 재단함으로써 진영논리를 확대 재생산한다. 그 결과 사안은 같은데 해석은 정반대다. 지난해 페이스북엔 ‘한국 언론의 보도 행태’라는 글이 돌았다.

 “예수 ‘죄 없는 자,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언론 ‘예수, 매춘부 옹호 발언’ ‘잔인한 예수, 돌 던지라고 사주’. 석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언론 ‘오만과 독선의 극치’….”

 전체 맥락은 생략하고 한쪽으로 몰고 가는 한국 언론의 습성을 대중들이 간파한 것이다. ‘충격 고로케’ 사이트가 주목받은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이 사이트는 ‘충격’ ‘경악’ ‘멘붕’ ‘발칵’ 같은 자극적인 제목을 쏟아내는 인터넷 기사들의 선정주의를 고발하고 있다. 신문·방송 기자들은 충격 고로케 현상을 개탄하곤 하지만 그들의 보도 역시 교묘하게 포장된 충격 고로케일 때가 많다. 한 언론학자는 그 원인을 이렇게 진단한다.

 “비단 언론 윤리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언론이, 기자들이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를 해부할 만한 전문성과 집요함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옳다, 그르다, 당위론에 머무르는 것 아닙니까.”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밥그릇 싸움’ ‘이익 갈등’으로 비판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밥그릇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과연 누구 밥그릇이 사회적으로 더 중요한지, 어느 쪽 주장이 맞는지 분석하고 판단해 줘야 한다. 독자들이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건 언론의 기본적인 서비스다.

 언론의 조폭성은 현장 상황을 사소하게 여기면서 내부의 생각을 강요하는 데서 나온다. 존경받는 성자(聖者)도 모든 상황에서 옳을 순 없다. 보수든, 진보든 모든 언론이 듣기 싫은 말에도 귀를 기울이고, 반대쪽에 선 이들의 다른 면도 보려고 노력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그래야 언론 전체를 향한 불신이 걷힐 수 있고, 우리 사회도 한 단계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이쪽, 저쪽을 가른 채 OX의 깃발만 나부끼는 사회는 위험하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