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개발 性域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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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6면

얼마 전에 인기를 끌었던 "여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What women want)"라는 영화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여자 속옷을 입고 화장을 하는 장면이 등장해 웃음을 산 적이 있다.

여성용품을 개발하려는 남성들이 여성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한 노력을 하는 가를 보여주는 예다. 사십 줄에 접어든 모 분유업체 임원은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머리 속에 온통 엄마와 아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

직업이 직업인만큼 분유를 한 개라도 더 팔기 위해서는 엄마 입장이 되지 않을 수 없어 급기야는 스스로를 "아줌마"라고 여길 때가 한 두번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여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미용과 같은 뷰티산업에 남성들이 진출하는 것도 낯설지 않다. 오히려 남성 미용사가 있어야 여자 손님들이 많이 든다고 한다.

이처럼 직업에 성역(性域)이 없어진 지 오래다. 특히 인간의 감성을 중시하는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우리 주변에서 남성과 여성이 서로의 영역에 잠입하는 성(性)의 퓨전 현상을 흔하게 경험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서비스 산업, 특히 디자인 분야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남성이 여성용품을 디자인하거나, 여성이 남성 용품을 디자인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개성화와 세분화 등 다양하게 전개되는 사회의 변화에 맞춰 디자인에서 이 같은 성의 퓨전 현상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동성들에게는 너무 익숙해져 스스로 간과하기 쉬운 문제를 이성들이 잘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 속옷 시장에서 맹활약하는 남성디자이너는 자신의 성공 이유를 더욱 객관적으로 문제를 찾아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에서 찾는다. 그만큼 고정관념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전혀 새로운 발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항상 새롭고 혁신적인 것을 만들어내야 하는 디자인의 속성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객은 상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산다"라는 말이 있듯이 상품기획이나 디자인 분야야말로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는 지름길이다. 그와 같은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상품과 서비스를 디자인하기 위해서는 상식을 훌쩍 뛰어 넘는 기발한 착상과 감성이 요구된다.

이성(異性)의 머리에서 나오는 아이디어가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졌다가 오히려 시장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는 사례는 이를 잘 웅변해 주고 있다.

정경원 < 한국디자인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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