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경주 백55호 고분의 출토품들|토기와 청동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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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신라 고분에서 우선 양으로 압도하는 출토품이 토기이다.
토기는 백제·가야 지방에서도 적잖게 나오지만 경주 특히 황남동 일대가 한층 많아서 최고 2백 점을 헤아린 예가 있고 보통이 수십 점이다. 그런데 155호 고분에선 청동기·철기·칠기 등이 단연 많고 토기는 불과 30점.
거의 같은 시대인 백제의 무령왕릉에서 한 점의 토기도 없었던 사실에 비하면 그 30점도 많은 숫자일지 모른다. 그러나 유물이 많았기로 첫 손꼽히는 금관총도 70여 점이었는데, 결코 그에 못지 않은 유물로 추산되는 l55호 고분의 그것은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 아닐까.
국립박물관 한병삼 고고 과장은 「삼국 가운데 신라가 가장 후진성을 띠고 있고 그래서 토속 문화를 더 짙게 간직했겠지만 서기 5∼6세기께에는 중국 육조 문화를 받아들여 뚜렷이 귀족 문화를 형성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금·은이나 금동 제품이 제한된 상류 계급이나 쓸 수 있는 것임은 물론 청동제 용기도 역시 마찬가지 성격으로 보는 해석이다.
그러면 토기는 말하자면 서민용의 생활 필수품일까. 신라 토기는 원삼국 시대 후기에 발생해서 서기 4백년 이전에 고배 같이 특징 있는 「스타일」까지 완성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일반 백성들은 목기를 쓰지 않았겠느냐는 점도 생각할 수 있는데, 막상 그런 서민용 목기의 유조 예가 없기 때문에 실제 막연한 추측이다.
155호 고분에서 토기가 적다는 것은 토기가 일반화됨에 따라 귀족층의 생활 용구로는 품격이 떨어짐을 뜻하며 그대신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청동기나 칠기로 대체됐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또 그 출토 토기의 중요한 목록을 보면 쇠솥의 뚜껑으로 쓴 것이 4점, 뚜껑까지 덮인 장군이 3개, 밑이 둥근 항아리 3개, 고배 6개, 반구형 그릇에 뚜껑 덮은 배가 5점 등을 들 수 있는데 그 나름의 특별한 용도를 생각할 수 있는 것에 한정된 느낌이다.
가령 장군의 경우 2개에 모두 계란을 넣었고 다른 하나의 항아리에도 역시 계란이 들어 있었다. 그 용기에는 모두 뚜껑이 덮여 있었는데 과연 계란이 신화적 종교적 의미를 띠는지, 단지 고급한 음식물로만 취급된 것인지는 별도의 문제라 하더라도 특별한 용도의 그릇임은 틀림없다.
특히 고배에 있어서는 같은 모양의 청동기와 칠기도 있는 까닭에 관점에 따라서는 이견이 없지 않다.
고배는 신라에 많은 특색 있는 기형으로 고구려 지역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 고배속에는 조개껍질이 담긴 일도 있어서 대체로 식기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금동제 고배가 4개, 봉황 당초 무늬를 그린 칠기 고배가 l개, 그리고 토기 고배 6개가 한꺼번에 나옴으로써 과도적 현상으로 보이는 한편에 그것들의 사용에 대한 적잖은 의문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155호 고분 발굴 담당자의 일부에서는 신라 토기의 고배가 본시 청동기에서 유인된 기형이 아닌가 하는 견해를 제기하는 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전 국립박물관 학예관 윤무병씨는 『토기가 신라에서 가장 발달한 것이고 멀리 중국의 용산 문화와 연결해 생각할 수 있는 고배이지만 155호 고분의 청동제 고배를 놓고 토기 고배에 선행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155호 고분의 청동기는 그 이전 청동기시대의 북방 문화와는 아무런 연관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고고 학계의 일반적인 관점이다. 설혹 금관이나 허리띠 같은 장신구에 있어서는 「스키타이」 문화의 잔재가 얘기되고 있더라도 일상의 그릇 붙이는 새로 수입된 문화 양식, 즉 육조의 영향이 짙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합·솥·다리미·초두 등의 청동기나 그 밖의 질기에 있어서 155고분의 출토품은 다른 고분보다 유다를게 없는데 다만 장니나 칠기가 완전하고 거기 그린 그림과 무늬가 뚜 렷한 점에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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