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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6)<제자 박병래>|<제32화> 골동품 비화 40년 (7)|박병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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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배성관의 만물상>
우리 나라 사람 배성관이 경영하던 골동상은 어느 모로 보아도 독특한 특징이 있었다. 그는 서울 장안뿐이 아니라 전국 각처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얘기해서 그의 가게를 골동상이라고 하기에는 좀 걸맞지 않은 데가 있다.
가게의 외모로 보나 쌓아놓은 물건으로 보나 그의 상점은 잡동사니를 수두룩하게 모아다 놓은 넝마전을 연상하면 된다. 배성관의 가게는 우리 나라 사람에게만 유명한게 아니라고 당시 재경 외국인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그도 그릴 것이 상투를 틀고 갓을 쓴 주인 전씨가 곧잘 영어며 일본어를 해가면서 고객을 응대하는 까닭이었다.
그 집에 가면 한마디로 없는게 없어 무엇이든 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천장에 주렁주렁 매어 달리고 이 구석 저 구석에 먼지가 쌓인 채 퀴퀴한 냄새를 내는 갖가지 장신구며 골동이 걸리적거려 가게 안에서 행보하기가 불편할 정도였다.
배성관 가게에 가면 없는 것이 없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집에 가면 각종 짐승이나 새, 특히 꿩 따위의 박제까지도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배성관 가게를 특히 이름나게 한 것은 머리가 둘이 붙은 기형의 송아지 대가리였다. 주인 배씨는 어디서 구했는지 그 기형의 송아지 대가리를 진열장에 얹어놓아 오가는 사람의 시선을 끌게 했다. 그 송아지머리는 장안에 사는 사람에게는 하도 오랜 세월동안 놓아둔 것이기 때문에 그리 신기한 얘깃거리가 못된다.
더구나 고속버스가 사통팔달하고 비행기를 타면 부산에서 당일로 일을 보고 돌아오는 요즘 시대와는 다르다.
1천짜리 동전 한푼이 아쉬운 지난날의 실정으로 몇십리 길을 걸어서 기차 삯을 아끼는 것이 그 당시의 인심이었다.
하물며 기차도 그리 흔하지 않거니와 더구나 오늘날처럼 벽촌의 구석구석까지 치닫는 버스란 상상하기조차 힘든 노릇이었다.
형세 있는 상인은 나귀등에 짐바리를 싣고 부지하 세월로 신작로를 따라오는게 보통이나 일반 사람은 그렇지도 못해서 오종종한 행낭을 꾸려서 짊어지고 꿰차고 짚신 신은 발로 하루에 몇 십리를 걸어서 서울에 당도한다. 이것은 조금 파장한 느낌이 있는 그 시대의 풍물상이라 하겠으나 적어도 배성관의 가게문을 어른거리는 원매자의 항상은 꼭 그러한 「타입」이 어울린다.
지척이 천리인 것이 요즘 세상이라지만 그렇게도 서울 구경이 힘든 그 시절에는 남대문에 걸린 빗장 하나가 시골에서는 무궁무진한 얘깃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서울에 갔다온 사람이 전차 탄 얘기를 자랑삼아 하게 되면 두메 사람에게는 그것이 3대를 물리며 세도를 부릴 밑천이로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멸치 한 됫박을 몇대를 내리며 우려먹는다던 그때의 시골 사정으로는 배성관 상점의 기형 송아지 대가리는 너무나 유명해지고 만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꾀죄죄한 행상의 시골 사람들이 한보따리씩 행낭을 치고 배성관 가게로 밀려드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서울의 남대문 모퉁이만 돌아서서 송아지 대가리 둘 있는 집』을 찾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송아지 대가리 둘이 있는 집은 그렇게 해서 방방곡곡에 이름이 나 버렸다. 이렇게 되니 주인 배씨는 자기가 원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만물상」을 차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주인 배씨는 팔러오는 물건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샀다. 그 대신 물건을 하나하나 골라서 값을 매긴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꾸러미로 후려 때려서 샀다. 한 꾸러미에 고작해야 10전, 20전하는 싸구려 시세로 막 사들였다.
시골 사람들은 송아지 대가리 둘 붙은 집에 가면 무엇이건 산다는 소문은 들었것다. 돈 생각이 나고 서울 가고 싶으면 전세품이건 골동이건 꾸려 가지고 배씨의 「만물상」을 두리번거렸다. 그래서 쌓이는 물건은 오죽지 않지만 그 중에 어떤 것은 그래로 쓸만해서 그때는 거간을 시켜서 물건값을 재량껏 받아오게 한다.
주인 배씨는 그때 거간을 한 10여명 거느리고 있었다. 이렇게 꾸러미로 산 물건 가운데 그래도 돈냥이나 받을 만한 것이 있으면 골라놓고 거간보고 『어디어디 가서 암만을 받아오게』한다.
배성관 만물상은 이렇게 물건을 막 사들이는 통에 당시 「호리꾼」이 잘 찾아갔다.
배성관 「만물상」을 얘기하게 되면 화폐를 모으던 유자후씨를 빼놓을 수가 없다. 성품이 온아 했던 유씨는 배성관 「만물상」에 살다시피 했다. 유씨는 양복에 대님을 두르고 술도 안 마시는 전형적 선비였다. 골동에도 남다른 취미가 있었다. 극장이나 다방을 즐겨 다니던 것이 그 특징이었다.
전해들은 바로는 유씨가 배성관 「만물상」에서 특히 혼수에 쓰이는 민예품으로 열쇠패의 수집을 많이 했다.
배성관 가게는 8·15 이후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하다가 6·25 동란 때 큰 화를 입고 모두가 풍지박산이 나고 말았다는 소문이 있다. 하여간 한동안 장안의 명물로 그렇게 유명하더니 이제는 아주 잊혀지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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