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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522> 중국 역사 속 개혁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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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신경진 기자

‘시진핑(習近平) 변법(變法)’. 중국공산당 18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에서 60개 항목의 개혁 방안이 나오자 대만의 한 신문이 붙인 제목이다. 맹자(孟子)는 일찍이 “500년마다 반드시 왕이 출현해 세상을 중흥시킨다(五百年必有王者興)”며 ‘개혁주기설’을 내놨다. 중국 역사상 성공한 혁명은 많았지만 성공한 개혁은 드물었다. 중국 역사 속 개혁가들을 살펴본다.

지난해 11월 12일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18기 3중전회(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폐막식에서 7명의 중앙정치국상무위원들이 손을 들어 ‘중공중앙의 전면적인 개혁심화를 위한 몇 가지 중대문제 결정’에 대한 찬성의사를 표시하고 있다. ‘결정’은 60개 항목에 걸친 대폭적인 개혁안이란 의미에서 ‘시진핑 변법(變法)’으로 통한다. [중앙포토]

진(秦), 상앙

개혁가 상앙(商<9785>·기원전 390~338)은 변법을 성공시켜 변방국가 진(秦)이 통일제국으로 나아갈 기반을 닦았다. 상앙은 군작(軍爵)제도를 도입했다. 경직된 귀족제와 달리 평민도 전쟁에 참전해 무장한 적군 한 명을 죽이면 부상으로 작위와 다섯 무(畝)의 땅을 부여했다. 공산당의 토지개혁과 유사한 동원 방식이었다. 일종의 선군정치이자 군국주의였다. 다른 나라들이 상앙의 신법을 야만스럽다며 비웃었지만 진은 연전연승을 거뒀다.

 상앙은 기존의 토지 공유제 격인 정전제(井田制)를 폐지했다. 토지를 새로 개간해 농민에게 나눠줬다. 일종의 토지 사유화다. 연좌제를 엄격히 시행해 사회안정을 도모했다. 도량형을 통일해 경제 발전을 촉진시켰다. 군현제(郡縣制)를 통해 중앙집권제를 확립했다. 상앙의 변법은 절대권력자인 황제가 평민과 이익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귀족사회를 해체시켰다.

 상앙의 개혁이 성공한 비결은 신뢰였다. 나무를 옮긴 자에게 상금을 줘 믿음을 샀다. 이목입신(移木立信·나무를 옮겨 믿음을 세우다)이다. 백성들은 개혁을 따르면 이익을 본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상앙의 변법은 여기까지였다. 개혁을 추진한 효공(孝公)이 죽자 모함이 쇄도했다. 망명 길에 나섰지만 “내가 만든 법 때문에 내가 죽는구나(作法自斃·작법자폐)”라며 최후를 맞았다. 선군정치를 신봉한 진제국도 통일을 달성한 뒤에는 더 이상 정복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없었다. 진제국이 통일 15년 만에 멸망한 이유다.

서한(西漢), 왕망(王莽)

상인의 속성은 이윤 추구다. 농경사회에서 기본적인 자원은 토지와 노동력이었다. 황제보다 지방관리가 자원에 대한 통제력이 강했다. 상인은 황제에 충성하기보다 지방관리들과 결탁했다. 한(漢) 무제(武帝)는 강력했던 지방 제후의 힘을 억눌렀다. 무제의 정치는 그 대가로 경제의 활력을 앗았다. 사회·경제·정치 분야에 복합 위기가 닥쳤다.

 이때 외척 왕망(王莽·기원전 45~서기 23)이 등장했다. 유가(儒家)의 이상사회인 주(周)나라 제도의 부활을 외치며 제도를 개혁했다. 탁고개제(托古改制)의 복고정치를 펼쳤다. 토지의 자유매매를 금지하고 정전제로 복귀하는 내용의 왕전(王田)제도를 시행했다. 노비제도도 폐지했다. 대지주의 토지 겸병을 억제하고, 농민의 노예 전락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후스(胡適)는 왕망을 “1900여 년 전의 사회주의 황제”라고 불렀다. 왕망은 화폐제도를 개혁하고 소금·철·술 등 주요 상품의 국가 전매제도를 시행했다.

 왕망은 역성혁명에는 성공했지만 개혁에는 실패했다. 그가 발행한 악성 고액 화폐는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농민을 위한 정치를 꿈꿨으나 농민 반란으로 몰락했다. 왕망의 개혁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주의였다. 개혁이 치밀하지 못했다. 부패한 관료층이 개혁을 주도했다. 개혁의 주도세력과 수혜세력이 달랐다. 대외정책도 몰락을 자초했다. 고구려(高句麗)를 하구려(下句麗)로 바꿔 부르는 등 주변국 군주의 지위를 ‘왕(王)’에서 ‘후(侯)’로 격하시켰다. 외교정책은 전쟁을 불렀다. 호족(豪族) 정권인 후한(後漢)이 왕망을 대신했다.

송(宋), 왕안석(王安石)

“하늘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과거의 관습에 얽매이지 말며,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 않겠다(天變不足畏, 祖宗不足法, 人言不足恤).” 왕안석(王安石·1021~1086)이 강력한 개혁 의지를 담아 한 말이다. 원자바오(溫家寶) 전 총리가 2008년과 2012년 양회를 마치고 가진 기자회견에서 인용해 더욱 유명해진 개혁 슬로건이다.

 왕안석은 걸출한 계획경제학자였다. 변법으로 중앙재정의 확대를 노렸다. 시역법(市易法)으로 중소상인에게, 청묘법(靑苗法)으로 농민에게 국가가 장기저리로 자금을 공급했다. 대상인과 지주에게 부가 편중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정부가 지방의 물자를 사들여 다른 지방에 팔아 유통과 가격의 안정을 꾀하는 균수법(均輸法)을 실시했다. 정부가 시장을 대신했다. 단, 왕안석의 ‘정층설계(頂層設計:Top-level design)’가 제시한 인센티브 시스템은 경제 효율성을 떨어뜨렸다. 농민과 상인, 지방관 누구도 이득을 볼 수 없는 개혁안이었다. 오직 중앙정부만 이익을 보도록 만든 방안이었다. 왕안석 변법은 개혁을 단순히 이익을 재분배하는 게임으로 변질시켰다.

 개혁은 모든 계층의 지지를 받아야 성공한다. 왕안석 개혁으로 손해를 보게 된 관리와 부유층은 반발했다. 백성조차 나눠 가질 파이가 커지지 않자 원성을 쏟아냈다. 기득권자의 조정 내 대표와 백성들의 원망이 쇄도했다. 개혁이 수혜자와 피해자를 만들면 정치투쟁으로 비화된다. 왕안석은 개혁 도중에 재상직에서 파면됐다. 신종(神宗)은 왕안석 낙마 뒤에도 개혁을 지속했다. 철종(哲宗)은 즉위 즉시 신법을 폐지했다. 정치투쟁으로 변질된 개혁은 추진 주체가 사라지면 폐지되기 마련이다. 변법의 실패 사이클이다.

 왕안석 변법은 강력한 반대파를 만들어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은 사마광(司馬光)이 이끈 구법당이 그들이다. 사마광은 역사의 배후에 변화하지 않는 도(道)가 관통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연대기식 편년체로 1300년의 중국 역사를 서술했다. 이상주의자 왕안석은 역사가 아닌 현실과 싸웠다. 개혁가에게 세계는 변화하는 것이었다. 변화와 불변이 대결했지만 보수가 개혁을 이겼다.

명(明), 장거정(張居正)

청(淸) 말의 대학자이자 개혁가였던 양계초(梁啓超)는 저서 『중국 6대 정치가』에서 명(明)대의 재상 장거정(張居正·1525~1582)을 관중(管仲)·상앙·제갈량(諸葛亮)·이덕유(李德裕·당나라의 명재상)·왕안석과 대등한 명정치가로 평가했다.

 장거정은 갓 즉위한 10세 만력제(萬曆帝)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황제를 대신한 섭정(代帝攝政)’ 자격으로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다. 핵심은 일조편법(一條編法)이었다. 토지세와 노동력을 징발하는 요역(<5FAD>役), 각종 잡세를 하나로 묶어 토지소유량을 기준 삼아 은으로 일괄 징수토록 만든 제도다. 일조편법이 시행되자 농민은 이익을, 부패 관리와 부자는 손해를 봤다. 장거정의 개혁은 10년간 지속됐다. 국고는 풍족해졌고 변방은 안정됐다. 개혁의 목표인 부국강병이 실현됐다.

 돌연 장거정이 병사했다. 개혁 정국이 끝났다. 밀어붙이기식 개혁에 침묵하던 반대파는 “과도한 권력으로 황제를 능멸했다”며 장거정 유족에게 멸문의 형벌을 내렸다. 개혁은 무위로 돌아갔다. 장거정에 대한 황제의 굳건한 믿음이 능멸로 바뀌는 데 불과 1년도 걸리지 않았다. 장거정 개혁은 사람에 의존한 개혁, 황권 앞에서의 신권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청(淸), 캉유웨이(康有爲)

청 말 망국의 위기 앞에 변법자강(變法自彊) 운동을 주도한 캉유웨이(康有爲·1858~1927)는 개혁가였다. 동시에 공자(孔子)의 저술이 이상적인 정치제도를 투영해 창작한 것이라는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전 세계의 평등사회를 주장한 『대동서(大同書)』를 저술한 사상가였다. 청조를 유지한 채 의회제와 헌법 도입을 목표로 한 변법은 캉유웨이가 주장하고 광서제(光緖帝)가 이끌었다. 1898년 4월 23일 광서제가 개혁을 표명했다. 캉유웨이는 황제에게 개혁 추진기구인 제도국(制度局) 개설을 건의했다. 수구파 대신들이 새로운 권력기구 창설에 반대했다. 대신 정형화된 팔고문(八股文)을 과거제에서 폐지하고, 서원을 학당으로 변경하는 등 일련의 개혁 조치가 취해지는 데 그쳤다. 7월 27일 광서제가 2차 개혁안을 반포했다. 유명무실한 관료기구를 철폐하고, 제도국 대신 기존의 무근전(懋勤殿)을 개혁기구로 설치했다. 개혁의 보위할 친위군을 창설했다.

 보수세력은 서태후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변법파 담사동(譚嗣同)은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서태후 제거를 요구했다. 위안스카이가 배신했다. 역쿠데타가 발동됐다. 캉유웨이 체포령이 내려지고 광서제는 중난하이(中南海)에 유폐됐다. 담사동 등 무술6군자가 처형됐다. 8월 초의 일이다. 입헌군주제를 목표로 100일 동안 펼쳐진 변법자강의 꿈은 무위로 돌아갔다.

덩샤오핑과 중국 개혁의 속성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개방을 시작했다. 개혁·개방은 중국을 전통사회에서 현대사회로 탈바꿈시켰다. 덩샤오핑은 농민·노동자·지방기업가에 의지해 개혁을 추진했다. 기층의 혁신을 이끌어냈다. 공유토지를 나눠 갖고 책임생산을 시도한 샤오강(小崗)촌 농민들의 목숨 건 모험이 농업개혁을 주도했다. 덩샤오핑이 주도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완전무결하고 원대한 계획은 없었다.

 중국의 유명 경제평론가 우샤오보(吳曉波)는 “중국의 역사는 중앙정부·지방정부·유산계급·무산계급이라는 네 이익집단이 벌인 게임이었다”고 말한다. 지방 통제를 위한 군현제, 사상 통제를 위한 유교 이데올로기, 문무 엘리트 통제를 위한 과거제, 부호를 통제하기 위한 억상(抑商) 정책이라는 네 개의 제도가 2000년 동안 중앙집권체제를 유지시켰다. 네 기둥 중에서 경제를 떠받친 제도가 가장 약했다. 주기적으로 변법이 시도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쉬샤오녠(許小年) 중·유럽국제비즈니스스쿨 교수는 “개혁은 인센티브 시스템을 개선해 사회의 총생산량을 늘리는 방식으로 개혁 향유층을 만들고 피해 보는 계층을 없앨 수 있을 때 성공한다”고 말한다. 진행 중인 ‘시진핑 변법’의 지향점이다.

신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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