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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9)<제자 박갑동>|<제31화>내가 아는 박헌영(158)|박갑동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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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패퇴의 월북 길>
나는「유엔」군에 쫓기며 맨 마지막으로 포천 지방을 통과하여 38선을 넘어 연 천에 도착하였었다. 38선을 넘어 이북 땅을 디딘 것은 해방 후 처음이었다. 쫓겨나면서도 그때 나의 관심은 5년간 공산주의 정권 하에 있던 북한이 어떻게 변하였는가에 쏠리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한가지도 달라진 게 없었고 말 한마디라도 별로 들은 게 없었다.
연 천에서 철원으로 갔다가 다시 철원에서 개성북방으로 갔었다. 무작정 달아난 것이다. 거기서 황해도의 시변리로 하여 신계·곡산을 지나 평안도로 들어가 평양 동북방 대동강의 상류 강 동에서 대동강을 건넜다. 평양으로 가려다가 도중에서 평양에 이미「유엔」군이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발을 북쪽으로 돌려 희천을 지나 자강도 강계로 갔었다. 강계에서 잠깐 머물렀다가 압록강가의 중강진까지 갔었다.
이러한 긴 도피로 중에 나는 북한주민 치고 얼굴의 볼에 살이 붙어 있는 사람은 한사람도 보지 못하였었다. 전부가 다 빼빼 말라서 광대뼈만 앙상하며 눈이 쑥 들어가 피로하며 굶주린 형상이었다.
어느 농가에 들어가서 안주인이게 물을 한 그릇 청하였었다. 이 안주인은 얼른 일어서려 하지 않았다. 내 뒤에서 총을 든 사람들이 재촉하니 겁이 나서 할 수 없이 일어서는데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추운 겨울이 닥쳐오는데 엷은 삼베치마 밑에 속옷을 아무 것도 입은 것이 없어 알 궁둥이가 마늘조각같이 비치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안주인은 창피하여 얼른 일어서지 못하였던 것 같았다. 그것을 눈으로 보고 나는 내가 새삼스레 이남 땅에서 공산주의운동을 한 것에 대하여 마음의 동요를 느끼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김일성이 북한에서 5년 동안 공산주의를 합 네 하여 인민들의 물질생활을 향상시켰다는 것이 이 모양인가. 나는 서울에 있을 때만 해도 이북사람들은 생활이 급진적으로 향상하여 다들 잘살고 있는 줄로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나는 어리석게도 우리나라가 다시는 남의 나라의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하여 급속도로 산업을 발전시키고 국민의 생활을 향상시켜 하루속히 부국강병 하려면 사회주의의 길이 가장 빠른 길이 아닌가 하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생명과 청춘과 전 정열을 다 바쳐 정치운동의 길에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실지로 이북 땅에 와 보니 현실은 딴판이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공상주의자였구나 하고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져 한참동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것뿐만 아니었다. 길가에 흰 한복을 입은 사람이 머리에 총알을 맞아 붉은 피와 흰 골이 터져 나와 죽어 쓰러져 있었다.
지방의 농민이 왜 이렇게 처참하게 맞아 죽었는가 나는 알고 싶어 옆에 걸어가는 북한군의 장교에게 물어 봤다.『민주당 새끼거나, 청우당 새끼들이겠지요』하는 대답이 돌아왔었다.
북조선민주당이나 천도교 청우당도 같은 우 당인데 우 당의 당원들을 이렇게 쏴 죽이는 법이 있는가? 나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일 모순을 느낀 것은 이남 땅에서는 어디로 가도 밥걱정은 하직 않았는데 38이북 땅에 와서 보니 밥을 얻어먹을 수가 없었다. 어느 집에 가도『우리 집에는 아무 것도 없슈요』하며 거절하는 것이었다. 이북주민들이 공산당원과 김일성 정권의 관료들을 싫어하는 것이 확실히 나타나 보이는 것이었다「유엔」군이 아직 들어오기도 전에 주민들이 인민위원회에 불을 지르며 국 유 창고의 문을 때려부수고 약탈하는 것을 여러 번 본 일이 있었다.
김일성 정권이 5년 동안 북한에서 주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한 것에 대한 원한이 폭발하는 것이었다. 인민군대의 중성을 붙인 장교(영관 급)들까지도 나와 이야기할 때 공공연히『이러한 무모한 전쟁을 시작한 책임은 전적으로 김일성이 져야 한다』고 김일성에 대한 불평을 감추려 하지 않는 것을 들은 일이 있었다.
우리는 대동강을 강 동에서 도하하여 평양으로 들어가려고 발을 서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런데 평양 쪽에서 한 청년이 헐떡거리며 뛰어오는 것이었다. 바지는 붉은 줄이 치인 군관(장교)바지를 입었는데 윗저고리도 벗어버리고 머리도 맨대가리였었다. 탈주병같이 보였다. 우리는 길을 막고 그 청년을 붙들어 물어 봤었다. 그 청년은 김일성이 가장 믿으며, 가장 좋은 대우를 해주는 군관(사관)학교의 학생이었다. 즉 김일성의 친위대후보생이었다.『왜 이 꼴을 하고 달아 가?』하고 물었다.
『다 틀렸수요. 평양에 들어 왔수요.』
『평양에 미군이? 전투 도 없이?』
『전투가 뭐시 우.』
『그래 군인이 전투도 하지 않고 도망간단 말이냐?』
『김일성이 제가 백전백승의 강철의 영장이라고 선전만 해 놓고 미군이 닥쳐오니까 저 혼자 제일 먼저 평양에서 달아 났수요.』
『김일성 동지가 평양에서 자기혼자 달아나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스탈린」이「모스크바」를 사수하듯이 김일성 동지는 최후까지 평양을 사수할 것이라는 것을 믿고 우리는 지금 평양으로 가는 길인데.』
『김일성은 벌써 평양에는 없 수다. 김일성이 평양에서 달아났다는 소문이 나자 평양수비부대의 군관·전사(병졸) 할 것 없이 다 뿔뿔이 흩어지고 말 았수요. 김일성의 헛 수작에 다 속았다고 욕들하고 있디 요』하고 그 청년은 다시 북으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 어이가 없어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평양에서 멀리 서울에 떨어져 있었던 우리는 김일성이라는 자를 너무나 몰랐고, 그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것을 다시 한번 더 깨닫게 되었었다. 북한 김일성 정권의 다리는 점토의 다리며, 북한 인민들과는 완전히 유리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북한 땅에 실지로 가보고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알기가 너무나 늦은 감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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