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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엽충 필두로 화석 ‘노다지’ … 5억 년 전 생명 빅뱅?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피카이아(pikaia). 빠르게 헤엄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척삭(나중에 척추로 발전)을 갖고 있다. 진화론자들은 이 생물이 오랜 세월 다양한 진화 과정을 거쳐 인간으로 진화했다고 본다. [ⓒQuade Paul]

여행을 떠나보자. 5억4200만 년 전의 지구로. 시간을 거슬러 우리를 데려다 줄 타임머신은 우주선도 겸하고 있다. 덕분에 우리는 지구 상공을 날면서 지각의 변동과 지표면과 수면의 동태를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다.

산에서 폭포처럼 쏟아진 물들은 자갈밭을 흐르는 얕은 실개천으로 변하고 만다. 실개천엔 피라미도, 개구리도, 잠자리도, 그리고 이들을 잡아먹는 새도 보이지 않는다. 굽이치는 거대한 강은 어디에도 없다. 왜 그럴까? 이제야 우리는 알아챈다. 나무와 풀이 보이지 않았다. 뿌리식물이 없으니 강둑이 생길 리가 없다. 습한 곳의 바위엔 이끼가 조금 끼어 있기는 하지만 지표면은 온통 벌거벗은 바위다. 빙하가 남아 있는 높은 산을 제외하면 사막 그 자체다.

그래도 조금 높이서 보면 지구는 여전히 아름답다.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해변의 기압은 현재 지구와 같지만 산소 농도는 에베레스트 정상 수준이다. 타임머신에서 내리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겠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산소 마스크를 쓰고 모래사장을 걸어보자. 모래는 말 그대로 모래다. 조개껍데기도, 산호 조각도, 성게와 게 껍질도 없는 산화규소 덩어리인 모래다. 지루하다.

보름달이 떴다. 고요한 세상이 환하다. 해변을 좀 더 탐사하고 싶지만 해안 절벽에 거품과 젖은 자국으로 남아 있는 만조 수위가 우리를 주저하게 한다. 수직으로 높이가 최소한 15m는 된다. 조수간만의 차가 이렇게 크다니! 그러고 보니 보름달이 엄청나게 크다. 아! 달이 지금보다 훨씬 가깝게 있나 보다. 그 때문에 조수간만의 차가 그토록 큰 것이다.

아무리 수억 년 전이라고 해도 이곳은 지구다. 화성처럼 아무 생명체도 관찰하지 못 할 리가 없다. 여기엔 바다가 있지 않은가!

일단 내륙으로 들어가서 지층이 켜켜이 쌓여 있는 노두(露頭)를 찾아 암석을 깨 본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뒤져도 생명의 흔적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5억4200만 년 이전의 지구엔 바다에 살고 있는 미생물이 생명체의 전부다. 우리는 고민을 안고 다시 지금으로 돌아간다. 이래 가지고야 지금처럼 다양한 생명체로 진화할 시간이나 있겠는가!

지구 자연사에 의문의 떼죽음 15차례

오른쪽에서 둘째는 전화기를 발견한 그레이엄 벨, 그 양옆은 비행기를 발명한 라이트 형제. 제일 왼쪽은 찰스 둘리틀 월코트(1910년). 당시 일반인들에겐 가장 덜 알려진 월코트가 이날 세 발명가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지질학사(史)에서 비교적 최근에 속하는 5억여 년을 고생대·중생대·신생대로 구분한다. 이렇게 나누는 근거는 간단하다. 바로 멸종(滅種)이다. 어느 순간 번창하던 생물들이 사라지고 앞 시대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생물들 세상이 된다. 지구 자연사엔 이유를 알 수 없는 떼죽음이 적어도 열다섯 차례 있었다. 멸종의 결과로 생명시대가 구분되는데, 첫 번째 생명시대인 고생대는 캄브리아기(期)로 시작한다. 캄브리아기는 라틴어에서 고래를 뜻하는 ‘캄브리아(cambria)’에서 유래한다. 1830년대 애덤 세드윅 목사가 영국의 웨일스 지방에서 몇 차례 발굴 작업한 후에 만든 용어다. 웨일스(Wales)가 ‘고래’란 뜻이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일 뿐이고 캄브리아기엔 고래는커녕 송사리도 살지 않았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지질학 교수였던 세드윅 목사는 식물학 교수였던 존 스티븐스 헨슬로 목사의 소개를 받아 신학생이던 찰스 다윈을 데리고 웨일스로 조사 여행을 떠났다.

19세기의 다윈도 우리와 같은 고민을 했다. 1859년 『종의 기원』을 출판할 때 다윈은 캄브리아기가 시작되면서 동물 화석이 갑작스럽게 출현하는 것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단순하게 생명의 종류만 늘어난 게 아니었다. 종-속-과-목-강-문-계라는 분류 체계에서 계 다음으로 높은 문(門)이 갑자기 37가지나 등장했다. 분류학에서 문은 몸의 설계에 해당한다. 이런 갑작스러운 등장은 ‘자연선택을 통해 생명이 분화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다’라는 그의 관점과 모순됐다. 다윈은 진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캄브리아기에 삼엽충을 비롯한 생물들이 폭발적으로 등장했다. 우주도 아닌 생명에 빅뱅(Big Bang)이 일어났다니! 캄브리아기 대폭발은 다윈의 진화론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겐 강력한 반증의 증거로 사용될 수 있었다.

다윈은 빠져나갈 구멍을 찾았다. 캄브리아기 지층 아래의 시대에도 생명이 살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화석이 보존되는 양상이 달라서 남아 있지 않든지, 남아 있어도 우리가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주장은 주장일 뿐, 아무런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달리 해석할 방법도 없어서 생물학계의 커다란 숙제로 남아 있었다.

생명 진화의 키워드는 기회와 우연성

오파비니아. 버제스 셰일 화석의 최고 ‘스타’로 다섯 개의 눈과 기상천외한 입을 갖고 있다.

삼엽충처럼 구조가 복잡한 동물들이 그에 앞서 단순한 형태를 띠는 과정도 없이 단기간에 나타났다는 사실은 진화론자들에게 큰 혼란이었다. 이 혼란에서 벗어나게 해 준 사람은 화석 사냥꾼 출신의 스미스소니언의 지질학자 찰스 둘리틀 월코트다.

월코트는 『종의 기원』이 출판된 지 20년이 지난 1879년 그랜드캐니언의 가파른 협곡을 탐사하면서 높이가 4㎞나 되는 캄브리아기 이전, 즉 선(先)캄브리아기의 지층을 발견했다. 여기서 그는 ‘스트로마토포라’를 발견했는데, 이것을 오늘날 ‘스트로마톨라이트’라고 한다. 비록 그가 당시 이것을 완족류의 흔적이라고 오해했지만, 어쨌든 세포질이 보존된 최초의 선(先)캄브리아기 유기체를 찾은 것으로 인정받았다. 이 유기체의 출현 시기는 30억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생명의 역사가 5억4200만 년보다 훨씬 오래됐다는 사실이 증명된 셈이다. 하지만 캄브리아기 대폭발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그 후 월코트는 승승장구했다. 스미스소니언학회 서기관이 된 월코트는 한 해 걸러 캐나다의 로키산맥에서 여름휴가를 보냈다. 1909년 8월 31일 그는 아내와 13살 먹은 아들을 데리고 버제스 고개에서 화석을 수집하다가 상태가 괜찮은 갑각류와 해면동물의 화석을 발견했다. 그는 여기에 뭔가 놀라운 것이 숨겨져 있다고 직감했다. 버제스 고개에 길이 난 것은 이미 1901년의 일이었으며, 그 길을 통해 수많은 사람이 다녔어도 아무도 화석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지만 발견의 역사에서 이런 일은 다반사다. 그래서 다음 해인 1910년 여름에도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버제스 고개를 샅샅이 뒤진 끝에 두께 2m, 길이 60m의 셰일 암맥을 찾아냈다. 셰일은 알갱이가 작은 진흙이 퇴적돼 만들어진 퇴적암으로 혈암(頁巖)이라고도 한다. 그들은 30일 동안 셰일을 쪼고 부수며 숨겨진 화석을 찾았다.

버제스 셰일엔 다른 캄브리아기 지층에서 발견할 수 없는 새로운 화석이 많았다. 월코트는 새로운 생물에 다양한 이름을 붙였다. 절지동물 하나엔 그것을 발견한 열네 살 먹은 아들의 이름을 따서 ‘시드니아 인엑스펙탄스’(시드니의 발견)란 이름을 붙였다. 괴상한 절지동물이 많았다. 월코트의 화석을 사람들이 주목하게 한 최고의 ‘스타’는 채 20개가 발견되지 않은 오파비니아 화석이었다.

오파비니아는 머리 앞쪽에 5개의 눈이 두 줄로 배열돼 있고 길고 유연한 주둥이가 있으며 주둥이 끝은 먹이를 잡을 수 있는 가시가 달렸다. 어떤 사람들은 입은 머리 아래에 붙어 있으며 코끼리 코처럼 길고 끝에 가시가 달린 기관이 먹이를 입으로 집어 올리는 데 쓰였다고 추론한다. 오파비니아는 해저의 부드러운 퇴적층에 살았을 것이다. 양 옆의 엽(葉)을 이용해 헤엄쳐 먹이를 추적했다. 꼬리는 안전장치 기능을 했다. 분류와 관련해선 고(古)생물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버제스 화석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발견은 껍질이나 단단한 외부 골격 없이 연한 몸체만 있는 동물들이 잘 보존됐다는 사실이다. 버제스 셰일에서 발견된 125속(屬) 가운데 80% 이상이 연질부(軟質部)로만 이뤄져 있다. 이것은 캄브리아기 초기에 단단한 외골격을 가진 생물들이 폭발적으로 출현한 것이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님을 말해준다. 삼엽충처럼 단단하고 커다란 생명체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연하고 작은 생명체가 얼마든지 있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월코트의 버제스 셰일 화석 발견 이후에 층(層)의 순서상 버제스 셰일보다 젊은 유타, 버제스 셰일보다 오래된 중국 윈난성(省)의 첸지앙, 그린란드 북쪽의 시리우스 파세트, 서(西)호주의 캥거루 섬에 있는 에뮤 베이 셰일 등에서 같은 화석들이 발견됐다.

이로써 난데없이 캄브리아기에 생명이 대폭발한 것이 아니란 사실이 증명됐다. 다윈이 죽을 때까지 풀지 못했던 의문이 해결된 것이다. 진화는 자연선택에 따라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점진적으로 일어난다는.

생명에 빅뱅은 없다. 생명 진화는 느리고 험난한 여정이다. 캄브리아기에 만들어진 몸의 설계 가운데 어떤 것은 사라지고 어떤 것은 살아남아 아직까지 번성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기회와 우연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여겨진다. 자연사란 기회와 우연의 절묘한 결합의 역사다. 그래서 생명은 경이롭다.



이정모 연세대 생화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독일 본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나 박사는 아니다. 안양대 교양학부 교수 역임. 『달력과 권력』 『바이블 사이언스』 등을 썼다.

이정모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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