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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공권력'을 민영화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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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권석천
권석천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석천
논설위원

인간은 말(언어)의 포로다. 세상에 나와 배우고 익힌 말로 생각하고, 대화하고, 글을 쓴다. 그래서 말을 장악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권력은 총구(銃口)가 아닌 말에서 나온다.

 영화 ‘변호인’에서 귓전을 울린 말은 “공권력”이었다. 1980년대 초반 속물 변호사였던 송우석(송강호)이 인권변호사로 성장한 건 “부당한 공권력”과 부딪히면서다. 공권력? 여러분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을 것이다. 열흘 전 철도 파업 지도부 체포 작전이 있었다. 경찰이 민주노총 본부가 있는 경향신문사 건물에 진입하는 장면이 생중계됐다. “공권력 투입” 속보에 “정당한 공권력 행사”라는 설명과 “공권력 남용”이란 반론이 맞붙었다.

 공권력이란 무엇일까. 법률용어사전을 찾아봤다. ‘국가나 공공단체가 국민에 대하여 우월한 주체로서 명령하거나 강제하는 권력.’ 국가기관을 위에, 국민을 아래에 두는 개념이다. 옛날 기사들을 검색해보면 공권력이 부쩍 많이 쓰인 때는 80년대였다.

전두환 정권은 특히 대학 구내에 경찰을 투입할 때마다 공권력을 들먹였다. “공권력을 빌려서라도 대학을 살리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식이었다. 하일식 연세대 교수가 ‘공권력’ 표현을 쓰지 말자고 연구자들에게 촉구하는 글을 99년 한국역사연구회보에 실은 적이 있다.

 “그들은 무자비한 탄압을 ‘공권력’이란 낱말로 정당화하려 했다. 자신들이 행사하는 폭력은 사회 자체의 공적(公的)인 이익을 위한 것이고, 노동자·학생의 처절한 저항은 사적(私的)인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므로….”(올바른 글쓰기를 위한 제언)

 공권력이란 말은 착시 현상을 일으킨다. 법 원칙과 혼용되면서 어떤 방식이든 문제가 없는 듯한 착각에 빠뜨린다. 그 결과 강경 대응으로 치닫기 일쑤다. 이번 경찰력 투입도 다르지 않았다. 정부가 국민들에게 공공부문 개혁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노력을 기울였다면 경찰력 투입 없이 사태가 마무리되지 않았을까. 경찰은 14층 민주노총 사무실까지 올라갔지만 파업 지도부를 체포하지 못했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체포영장 집행이 그렇게 급하고 중요하다면 체포를 했어야죠. 다시 들어갔어야죠. 법과 원칙은 그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결과적으로 법만 우습게 된 겁니다.”

 정부에 비판적인 이들 역시 공권력을 과장하곤 한다. “공권력이 침탈해오면….” “무소불위 공권력이….” 흡사 거대한 괴물이다. 그날 파업 지도부가 법원에서 발부한 영장 집행을 피한 것으로 드러나자 환호하는 모습은 씁쓸한 풍경이었다.

 이제 철도노조 파업이 막을 내렸다.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박근혜정부의 가치 전쟁(value war)에 힘이 실렸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나친 확대 해석은 금물이다. 정부가 세운 원칙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공권력의 승리’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새해에는 공권력이란 말이 되도록 쓰이지 않았으면 한다. 국민이 정부에 위임한 건 권력이 아니다. 권한이다. 권한(權限)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공(公)이란 수식어도 부적절하다. 공이 무조건 사(私) 위에 있다는 발상은 권위주의 체제에서나 가능하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건 이른바 공권력이 과거만큼 ‘유능’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요즘 판사·검사·경찰은 87년 민주화의 세례를 받은 세대들이다. 그들의 손발은 영화 ‘변호인’의 시대처럼 착착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진짜 공권력이란 것이 있다면, 아니 있어야 한다면 다른 노력을 다한 다음에, 신중하게 등장하길 바란다. 먼저 투입돼야 할 것은 소통의 정신이다. 정부의 소통은 듣고 또 듣는 것이다. 작고 잊혀진 이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 존재를 증명해주는 것이다.

 2014년의 우리가 군부통치 잔재에 묶여 있을 이유는 없다. 어쩌면 민영화가 시급한 건 공, 권, 력, 세 글자인지 모른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