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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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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미 상고시대부터 우리 가정에선 양조법이 발달되어 왔으며 특히 고려 후기 원나라로부터 소주법이 들어온 이후 소주에다 각종 화향이나 약미를 섞어 빚는 술의 종류가 수없이 많았다. 곳곳에 물이 좋기 때문에 지방마다 특색 있는 명주를 으례 한두가지씩 자랑할 정도였다.
『밥 먹기를 봄같이 (따뜻함)하고 국 먹기는 여름같이 (뜨겁게), 장 먹기는 가을 같이 (서늘하게), 술 먹기는 겨울같이 (차갑게)하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술은 소주를 바탕으로 아주 차갑게 먹는 것이 상례였다.
소주는 추운 북쪽 지방에서 사시 상용했으며 남쪽 특히 경상도 지방에선 여기에 약제를 넣어 약 소주를 담아 즐겨왔다.
이조실록에 보면 소주가 너무 많이 유행하여 『낭비가 크므로 금해야 한다』는 진언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현재는 이 소주에다 국화·오가피·구기자·인삼 등을 넣은 화향주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지만 우리 나라의 술은 상고시대부터 오늘까지 각종 제의례나 혼례·상례·손님 접대 등 어느 때나 기본 필수 음식으로 쓰여졌으며 또 그만큼 많이 즐겨왔다.
우리의 술이 종류와 내용이 다양해지기는 이조 중엽이 극을 이루며 따라서 술안주도 상당히 발달했었다.
이조 때 문헌 속에 나오는 술의 종류만도 수십 종에 달하며 대개 이런 술들은 각 가정에서 직접기호와 풍류에 따라 빚는 것이다.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가내주 종류만 40여종에 이른다. 이런 술들은 독특한 향기가 기풍게 하기 위해 향료를 넣거나 보신이 되게 약제를 넣었다. 즉 한 가정의 술은 가풍과 주인의 풍류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술집 (주막)이 생긴 것은 고려 숙종 2년 (1097년) 개성에서였다. 그후 곳곳에 주막이 생겼고 특히 서울 근방이 유명하여 남주북병 (서울 남쪽은 술, 북쪽은 떡이 좋다는 뜻)의 말이 생겼다.
맑은술 (청주)을 약주라고 하는데 이 말은 이조 중종 때 서울 약현 (약고개=지금의 중림동 부근)에 살았던 이씨 부인 (서거정의 후손 서해의 부인)이 남편 잃고 술장사에 나섰는데 그 솜씨가 뛰어나 「약현집 술」로 소문이 난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조선의 명주로는 평양의 감홍로 (소주에 단맛 나는 재료를 넣고 홍곡으로 붉은 빛을 낸 것), 전주의 이강고 (배와 생강즙, 꿀을 섞어 빚은 소주), 전라도의 죽견고, 김천의 두견주 (진달래꽃 술), 서울의 과하주 (약주에 소주를 겪어 빚음)가 손꼽히고 있다.
「홍길동전」의 작자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개성의 태상주 (나라의 제수를 맡았던 봉상사에서 빚은 술)를 첫손에 꼽았다.
술을 빚는 일은 한 가정에서 장 담기나 김장에 못지 않게 중요한 계절 행사로서 누룩을 밟을 때부터 빚는 날 등 모두 길일을 택해 하였다.
물도 청명수·곡우급수로 만들어야 색과 맛이 좋다고 했으며 가을 이슬을 쟁반에 받아 그 물로 빚은 술을 특히 추로주라 하여 귀한 술로 꼽았다.
술 빚는 법에 따라, 즉 재료의 종류·비례·발효기간 등을 달리하면서 다양한 이름을 붙여왔는데 누룩은 삼복 중에 빚으면 불생충이라 해서 초복 후를 가장 좋은 시기로 잡았다. 누룩은 2년이 넘으면 좋지 않다.
술이 익는 시간에 따라 술 이름을 붙이는 경우도 많아 아침에 빚어 저녁에 먹는 일일주에서부터 시급주 (3일만에 먹음), 칠일주, 하절 삼일주, 삼오주 (정월 첫 오일에 빚기 시작하여 오일마다 덧술 빚어 단오절에 먹는 것), 백일주, 일년주 등이다.
특히 백일주는 술독을 대문간에 백일동안 묻어 두어 백일 되는 날에 파내 마시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오랫동안 묵힌 솔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드나드는 장소에다 묻어 남몰래 다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윤호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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