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정치권의 '말의 빚'과 '혀의 파산선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올해의 정치권을 반추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교훈이 언어의 품위다. 새 정권을 둘러싼 갈등이 반목과 증오로 확대되면서 일부에선 말이 저주의 비수(匕首)가 되었다. 민주당 홍익표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을 가리켜 ‘귀태(鬼胎-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사람)’의 후손이라 했다. 같은 당 양승조 최고위원은 박정희 대통령의 10·26 피살을 언급하면서 딸이 같은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했다.

 야당의 정권 공격만이 아니다. 일부 여야 의원들은 국회 회의장에서 비속어와 막말을 섞어가며 핏대를 올리곤 했다. 국정감사장에서는 일부 의원이 피감 기관장을 상대로 ‘언어의 갑(甲)질’에 빠지곤 했다. 한국어의 수준은 여의도 상공에 이르면 뚝 떨어지곤 했다.

 선진국에서는 상대방의 인격을 모독하고 의원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언어 행위는 엄격한 제재를 받는다. 야당인 공화당 조 윌슨 하원의원은 의회 연설 중인 오바마 대통령을 향해 “거짓말 마(You lie)”라고 외친 적이 있다. 미 의회는 역사상 처음으로 비난 결의안을 채택해 그의 무례를 질타했다. 지역 유권자들은 윌슨의 경쟁자를 위해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윌슨은 용서를 구하느라 바빴다.

 한국 정치의 언어 일탈은 급기야 국회의원의 막말을 규제하자는 국회법 개정안이 발의될 지경에 이르렀다. 새누리당 류성걸 의원의 개정안은 의원이 회의 중 고성을 내지르거나 반말 또는 비속어를 구사할 경우 징계를 내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국회법이 제재하는 폭력행사 속에 언어적 폭력까지 포함시키는 것이다. 지난 7월엔 같은 당 이노근 의원이 비슷한 법안을 내놓은 적이 있다.

 헌법 제45조는 국회의원이 직무상 한 발언에 대해 사법상의 면책특권을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발언 내용에 있어 의원의 소신을 보호하려는 것이지 발언 형식의 윤리적 만용까지 감싸주는 건 아니다. 법정 스님은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써놓은 책까지도 ‘말의 빚’이라고 했다. 스님에 비하면 막말 의원들은 ‘혀의 파산선고’를 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