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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을 다녀와서- 나순옥-첫 중공방문 한국인 나순옥 여사의 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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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북경을 다녀왔다. 24일 동안의 관광여행을 마치고 우리 일행이 「홍콩」에 무사히 도착했을 때까지 나의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왜 그러냐하면 나는 어디까지나 한국인으로서 지금까지 우리가 「죽의 장막」이라고 불러온 중공을 처음 방문했기 때문이다. 나의 남편은 비록 중국인이지만 나는 조국과 부모를 그려오는 한국인.
30년만에 한국인을 처음 받아들이는 중국의 국경은 뜻밖에도 부드러웠다. 남편을 비롯한 중국인 2세 일행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6·25의 기억을 쉬 잊을 수 없는 나로서는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우리 일행이 광동성과 「홍콩」의 접경인 국경「로우」에 도착한 것은 5월27일 점심때. 다른 여행자들은 모두 세관 앞에 줄을 짓고 수속을 밟는데 우리 관광단 일행은 곧장 귀빈실로 안내되어 앉아서 수속을 밟았다.

<아주 친절한 마중 받아>
녹차를 내온다. 짐을 날라준다 친절하기 짝이 없는 마중이었다. 이어 차려져온 점심은 12가지 진미가 오른 전통적인 중국요리였다. 일행과 똑같은 환대에 불안기마저 있었던 나로선 얼떨떨하기조차 했다.
점심을 먹고 기차 있는데 까지 걸어가는 도중(1「블록」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옷이 흠뻑 젖었지만 몸은 훈훈한 기분이었다.
하오1시 광동행 기차에 올랐다. 중공여행의 「스타트」였다.
차창을 스쳐 가는 마을주위에는 물소·가축 등이 띄엄띄엄 보였으며 첫 인상은 아직도「빈곤스럽다」는 것이었다.
광동역에 도착, 의사·관리 등 수백명의 마중을 받고 곧장 16층 짜리 화교대청에 첫 여장을 풀었다. 먼저 8층 사무실로 가 숙박계를 쓰고 안내자인 「야오」와 인사를 나눴다. 이어 7가지 음식으로 차린 저녁을 먹고 광동대 극장으로 가 모택동을 숭앙하는 내용의 경극을 보았다. 극은 노래·춤·곡예로 진행됐으며 열광적인 연기였다. 이튿날 아침「버스」로 농아학교를 방문했다. 기숙사 같은 2층의 이 학교는 날 때부터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어린이들을 모아 4년간 침술치료를 하는 곳.
아이들이 책상 앞에 앉아 귀 옆·엄지손가락·둘째손가락 등 세 곳에 침을 맞고 있었다.
이렇게 하루에 3번씩 4년간 치료를 하면 80%는 말문과 귀가 트인다는 학교측의 자랑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트인 아이들이라며 노래와 춤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실이라면 의사출신의 우리로서도 놀라운 성과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해서기념비·내년에 완성될 정거장·새 박람회장·공원·실내운동장·관청 등을 구경하고 광동에서 가장 호화로운 「팜수」반점으로 가 15「코스」짜리 만찬회에 참석했다. 오리고기·해물이 많이 나왔으며 값은10원(5달러). 그러나 숙식비와 교통비는 모두 자기들 부담이기 때문에 신경 쓸 것은 없었다.

<온돌에 돗자리 깐 농가>
다음날 우리는 인민공사를 방문하고 농장도 둘러봤다. 농사는 잘 되는지 호박이 굉장히 컸다. 한 농가에 들어가 보기도 했다. 노부부·아들·며느리·손자·손녀 등 6식구가 사는 이 집은 방이 서너 개 됐는데 전부 조그마한 것들이었다. 방은 「콘크리트」바닥 위에 다시 진흙으로 온돌을 놓고 그 위에 돗자리가 깔려있었다.
우리네 동대문·남대문 시장 안의 임시가겟방 온돌 비슷한 구조였다. 수도는 없고 우물에「펌프」를 박아 쓰고 있었다.
광동을 보고 난 우리는 중공최대인 광동 공항으로가 DC-3기 비슷한 소련 제 비행기를 타고 모택동의 출생지인 호남성 상담에 잠시 착륙했다가 한구로 갔다.
비행도중 「스튜어디스」는 물수건·사탕·「바나나」·껌 등을 돌리며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한구는 서방의 어떤 공항에도 비견할 수 있을 만큼 근대화해 있었다.
다음은 1천년동안 2번이나 수도가 됐던 고도 항주를 방문했다. 6월1일부터 3일까지 묵으며 유명한 관광지인 서호 등을 관광했다.
서호는 이쪽 끝에서 저쭉 끝이 보이지 않게 잔잔히 넓었다. 우리는 이 서호에 새로 들여온 듯한 「요트」로 선유를 즐기며 고이 보존돼있는 3개의 수중 탑과 고적·새 동물원 등을 둘러봤다. 한강에서처럼 조그만 놀잇배를 타고 즐기는 일반인도 많았다.

<호반엔 암불과 절 많아>
호반의 거대한 암불과 절간도 구경했는데 아름드리 통나무기둥으로 못을 쓰지 않고 지은 절이었다. 그러나 절엔 목탁도 없었고 중도 없었다. 아마 적당한 일거리를 구해 작업을 하는 모양이었다. 유명한 명소 옥천에는 40∼50「파운드」는 족히 됨직한 물고기들이 펄펄 뛰고 있었다.
우리는 또 교외의 발전소도 돌아보았다. 가는 동안 수레를 끄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 그냥 걸어가는 사람 등을 무수히 만났으며 그들은 한결같이 야채에서 돌덩이까지 온갖 물건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항주 시내를 벗어나니까 길이 어떻게나 험한지 3∼4시간 걸려 도착했을 때는 온몸이 뒤틀렸다. 우리는 『혁명 후에 얼마나 발전했느냐』하는 예의 「브리핑」을 한차례들은 뒤 높이4백m의 「댐」위로 올라가 기선을 타고 호반을 유람했다. 저녁에는 그곳에서 가장 좋은 음식점에 갔으나 모기가 얼마나 많은지 무기들이 음식을 다 먹어치울 것만 같았다.
다음에 여장을 푼 상해 국제 「호텔」은 14층 짜리로 방이 기가 막히게 잘 꾸며져 있었다.
상해서는 먼저 인민산업전시장을 구경했다. 기계류·직물·의료기구 등이 전시돼있었고 벼 수확기·「트랙터」·승용차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런데 승용차는 미국의 42년∼45년형 같은 구형이었다.

<소녀들의 사격술 훌륭>
다음 「코스」는 어린이전당. 음악·체육·과학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으나 그보다 사격장에 가서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것은 우리가 갔을 때 6살 짜리 소녀가 날아가는 풍선을 명중시키는 믿기 어려운 사격솜씨를 시범해 주었기 때문이다.
상해극장에 가서는 곡예단의 공연을 구경했다. 이들은 지난 겨울 미국을 방문한 바로 그 곡예단이었다. 저녁에는 맛있는 상해 「우동」으로 식사를 끝냈다.
6월7일 아침 우리는 상해 제9지구병원을 방문했다.
5백개의 병상을 가진 이 병원은 완벽한 시설을 갖추었는데 「컬럼비아」대학교 의대에서 공부했다는 「초」교수의 안내로 내부시설을 둘러보았다.
먼저 수술실을 찾아가 각종 정형수술과정을 설명 듣고 침술에 의한 마취하의 수술을 직접 목격했다. 오후에는 책방과 골동품 장을 돌아봤다. 한 골동품 장에서는 찬란한 백옥으로 된 조각하나의 가격표가 1백20만「달러」로 적혀있는 것을 보았다.

<의료기구들은 수제품>
이어 제2지구병원으로가 치과기구·수술대 등 갖가지 의료기구를 수공으로 만드는 방대한 시설을 구경했다.
놀라운 것은 온갖 정교한 수술도구들을 모두 손으로 만드는데 완제품이 어느 서방국가에서 기계로 대량 생산한 것과 다를바 없이 훌륭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이 사용하는 「모델」은 20년 내지 30년전의 구식이었다.
6월9일 상오6시 우리는 열차 편으로 6시간을 달려 남경에 도착했다.
남경은 8개 왕조가 거쳐갔고 손문 선생의 묘소가 있으며 또 장개석 총통이 20년 이상 국민정부의 수도로 정했던 곳이다.
여기서 유명한 배경원인을 소장했던 박물관을 관람했다. 벽에는 북경원인에서 시작하여 현대인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의 고대인이 진학해온 과정을 그린 그림과 이들의 거주지역을 표시한 지도가 걸려있었고 이러한 진화과정을 입증하기 위한 여러 가지 고고학적 유품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꼬마군인들 무극 구경>
오후에는 손일선 선생의 묘지를 참배했다. 3백92계만을 걸어 올라간 조그만 산 위에 위치한 이 묘지는 잘 간직되어 있었으며 남경시가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손문 선생은 25년에 사망했는데 이 묘는 26년에 시작되어 3년만에 완성된 것이다.
저녁에는 꼬마 군인들이 출연하는 무극을 구경했다.
6월11일 남경교외에 있는 발전기와 원동기 제작공장을 시찰했다.
공원들은 작업능률과 재훈련성과 등에 따라 8등급으로 나누어 생활수당을 제외, 최소 10「달러」에서 1백「달러」까지 받는다는 간부의 설명이었다. 이곳에서의 사람들도 외국인을 보면 멍하니 쳐다보는 습관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지극히 자부심이 강하다는 걸 느꼈다. 외국인이 주는 선물은 절대 받는 법이 없으며 「팁」도 결코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언제나 친절했다.
이날 하오4시 우리는 북행기차에 올라 16시간만에 마지막 「코스」인 북경에 도착했다. 도착시간은 12일 상오9시. 정거장엔 안내원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옥과 명주제품 등 전시>
특이한 것은 같은 중공 안인데도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갈 때마다 「패스포트」에 「스탬프」를 받아야 하는 제도. 그래서 북경에 도착했을 때 「패스포트」의 「스탬프」는 5개로 늘어났다.
다른 여행자들과는 달리 우리는 안내원이 맡아 처리 해줘 번거로움을 덜 수 있었다.
북경에서의 첫 방문처는 명·청조의 왕궁이었고 지금은 박물관인 자금성 l.72만 평방m의 성내에 9천개 이상의 방을 갖고 있는 이성은 현재 원형대로 남은 전통 건물로 우리 모두에게 깊은 인장을 주었다.
방 두개 짜리 농부의 집을 방문했는데 안의 세간살이는 우리 나라에서라면 골동품으로 취급될 만큼 오래된 것이었다. 그곳 의무실에서는 적각의생(맨발의 의사)을 보았는데 이 의사는 실은 3개월 정도의 기본훈련만 받은 보조원 정도의 자격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평시에는 농부들과 마찬가지로 일하다가 환자가 생기면 응급치료를 해주는 정도의 임무를 맡고있었다.

<동북에 한인 백만 살아>
6월14일 상오8시쯤 「버스」를 타고 3시간 여행 끝에 「천유관」이라는 만리장성의 전초기지에 도착했다. 만리장성의 이 부분은 명조 때 복원된 것으로 넓은 바위를 토대로 쌓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 올렸다. 이 지점의 성의높이는 6·6m였고 너비는 아래쪽이 6·5m, 위쪽이 5·5m였다. 성은 산 능선을 따라 꾸불꾸불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성 위에서 내려다보니 꼬리와 머리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용의 몸뚱어리를 보는 것과 같았다.
6월15일 공예품 전시장에 가서 여러가지색깔의 옥을 구경했다. 그밖에도 명주제품과 자수제품이 많이 전시돼있었다.
오후에는 중공 내 소수민족의 젊은이들이 다니는 대학을 방문했다. 몽고·「티베트」등 변방에서 모여든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이중에는 동북부에 사는 한국교포들도 끼여있었다.
나는 여기서 동북부쪽에 1백만명 정도의 한국인이 살고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중학교를 졸업한 후 2, 3년 동안 공장이나 농촌에서 작업을 한 젊은이들이다. 여기서는 모사상·「레닌」사상 등 경치교육과 중공의 문화, 그리고 중국어 등을 가르쳐 졸업 후에 자기지역으로 돌아간 후 중국화 사업을 벌일 수 있도록 훈련시키고 있다.
6월16일 북경의대를 방문했다. <본사 조동오특파원 긴급입수-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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