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황도의 악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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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세계 지도상에서 유황도는 한 점으로 나타난다. 일본의 동경만에서 동남방으로 한참 내려가면 태평양 한 가운데에 「이오지마」(Iwo Jima)가 있다. 「괌」도와 동경만의 중간쯤이다.
이 섬은 동서로 5.4㎞, 남북으로 3.2㎞만한 크기이다. 암석의 산과 유황사로 뒤덮인 그야말로 창해일요.
미국의 정예 함대는 l945년 2월16일 새벽, 태평양 상에서 이 섬을 향해 일제히 함포 사격을 감행했다. 이 작전에 참가한 함구는 전함 7척, 중순양함 4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30척, 상륙용 주정 7백50척이었다. 가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상당한 공습도 함께 감행되었다. 1백20대의 함전기가 출격했다. 그것은 무려 72시간이나 계속되었다. 암석이 부서져 모래가 될 정도였다고 한다.
2월19일 미군, 미해병 제4·5사단은 드디어 상륙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적은 잠잠했다. 미군은 5백 「야드」쯤 포복(포복)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총격전을 맞이했다. 일본군들은 화산 지대인 이 섬의 암석 동굴 속에 잠복해 있었다. 따라서 근접 거리가 가까운 만큼 전투는 치열했다. 「이오지마」 상륙은 미국 역사상 가장 처절하고 값비싼 전투를 치른 경우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이 좁쌀알만한 섬을 점령하는데 무려 36일간의 작전을 한 것을 보아도 그것을알 수 있다.
미군의 사상자는 1만9천9백38명으로 사망자는 무려 4천1백89명. 일본군은 사망자만 해도 2만2천명. 일군 유황도 수비총사령관 「구리바야시」는 그 시체조차 끝내 찾지 못하고 말았다.
그 당시 AP기자 「조·로젠덜」(Joe Rosenthal)의 유명한 사진이 있다. 5명의 미해병이 힘을 모아 「스리바찌」 산정에 성조기를 세우는 광경이 그것이다. 미군은 「이오지마」상륙 4일만인 23일 이 섬의 최고 산정인 「스리바찌」에 성조기를 꽂았었다. 그후 이 사진은 혈전에서의 승리를 나타내는 미군의 「전승 심벌」이 되었다.
미국이 「이오지마」를 그처럼 피로 점령 한데는 이유가 있다. 일본열도에 공격을 하기 위해서는 여기보다 더 적합한 공군기지가 없었다. 그것을 능히 알고 있는 일본으로서는 최후의 한 순간까지 그곳을 지켜야 했다.
최근 일본에서 공개되었다는 유황도 전투의 「다큐멘터리」 영화는 바로 이 장면이다. 이미 그 장면의 일부는 기록사진으로도 남아 있다. 황량한 모래의 벌판엔 일본군의 시체들이 돌멩이처럼 흩어져 있었다. 물론 이들 중엔 일본군에게 강제로 징용되어 끌려간 우리 한국인들도 많다. 한 기록을 보면 2천명쯤은 된다고 한다. 새삼 우리는 악몽의 과거에 몸서리 쳐진다.
일본은 요즘 그 영화를 공개하는 자리에서 한국인들이 미군에 투항하는 것에 냉소를 보였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뼈아픈 패배감을 그린 것으로나 위로하려고 한 것 같다. 남의 상처를 보고 웃는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경멸을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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