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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서애 유성용의 아들 유진의 난중 체험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처음 보는 참수된 목>
이튿날 일행은 영평(경기도 포천군 영중면·동면 일대)으로 갔다. 그때 할머님은 현등사에 평안히 계셨고 조종에 왜가 있다는 말도 뜬 소문이었다. 그것은 가평원이 거짓 공적을 올리려고 피난한 사람을 함부로 베어 왜라 하고 나라에 보고한 까닭에 그 말이 잘못 전해진 소문이었다. 거기에 속아 할머님 계신 곳을 그리 가까이 두고도 가지 못하니 어찌 괴로움이 아니리오. 한갓 애달플 뿐이었다.
한 곳에서 점심하려고 하는 참인데 어떤 사람이 소리쳤다.
「이 앞에 사람을 베어 달았으니 보고 놀라지들 마시오」 과연 우리가 10리를 못 가서 사람 다섯을 베어 참죽나무에 매단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제 사람 벤 것을 처음으로 보니 어떻게나 놀라왔던지 하루 이틀이 지나도록 목줄띠에 피맺혀 뚝뚝 떨어지는 모양이 눈에 삼삼하여 도무지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저녁에 영평 백운산(경기도 포천군과 강원도 화천군의 경계·904m)밑에 이르렀다. 박춘이란 집을 찾아가니 처음은 퍽 싫어하여 쉽게 붙이지 아니하더니 좀 사귀니까 점점 따뜻하게 대접하여 마치 겨레권당 같았다.

<백운산에 잠시 피신>
이 집에서 대엿새 묵고 있는데 또 왜가 온다는 소문이 돌아 박춘이란 분을 쫓아 백운산에 들어갔다. 그 산은 깊고 웅장하여 진실로 깊이 들어가면 도둑은 근심 없을 만 했다.
저녁에 평안도에서 아버님이 부리시던 사람이 왔다 하기에 진동 한동 달려 내려오니 아버님이 평안도 평양에서 종 복이로 하여금 할머님 계신 데를 수소문하여 안부를 알아오라 보내신 것이었다. 그때에 그 땅에서 반갑던 일을 어디 측량하리오.
『대부인께서 현등사를 거쳐 양근(양평)땅을 향하여 경상도로 떠나셨노라 대감께 여쭙겠나이다.』
물러가는 복이에게 유무(편지)하여 맡겨 보내었다.
박춘의 집에서 또 이레를 묵었다. 그런데 피난한 사람들이 함경도로 간다고 모두 떠나기에 우리도 가려 하니 박춘이 만류했다.

<함경도로 떠나기로>
『도둑이 가려하면 함경도인들 못 가리이까. 저번에 가계시던 백운산이야말로 피난할 만한 도원이므로 가지 마십시오. 소인이 모시어 무사히 지내시게 하리이다.』
박춘의 말이 온공하고 정성이 여간 간곡하지 않은지라 일행은 다 고마워하여 그 말대로 머무르려고 했다. 그러나 이 진사의 벗되는 분은 형님을 꾸짖으며 막무가내였다.
『자네는 여러 권속을 모시고 있는 처지에 배행을 멀리 가도 맞듯, 못 맞듯 하려 할 것인데 어찌 미천한 상놈의 말을 듣고만 있는고. 여기 앉았다가 어쩔 참인가. 자네를 위하여 자못 위태하게 생각하네.』

<위경에도 상놈 타령>
그분의 말에 따라 형님은 부득이 판관(의조부)께 여쭈어 짐을 차리게 했다. 그러나 박춘은 더 말려도 듣지 않을 줄 알고 아예 자기 말(마)에 짐까지 실어 주었다. 뿐더러 그는 하룻길을 따라와 보내고 가니 그 따뜻한 마음씨는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길에는 곳곳에 군사들이 막을 짓고 풀어 살피고 있었다. 하나 그들은 도둑과 다를 바 없어 피난하는 사람들의 화살이나 말을 빼앗았다. 우리 일행은 그날 박춘의 덕에 그 같은 사람을 아는지라 무사히 지나갔다. 금화땅에 이르러 한마을에 드니 주인이 여간 강포하지 않았다. 형님이 행장에서 참빗(진소)들을 꺼내 주니 한결 누그러졌다.
거기서 하루 묵어 평양땅으로 가기로 했다. 【홍재휴 교수(대구 교수) 교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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