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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백성호의 현문우답

반가사유상, 미소의 비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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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영화 ‘킬 빌’의 주인공은 우마 서먼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로버트 서먼. 컬럼비아대 명예교수이자 세계적인 불교 학자입니다. 한국을 찾을 때마다 서먼 교수가 우선순위로 꼽는 일정이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만나는 일입니다.

 서먼 교수는 “서양에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한국에는 반가사유상이 있다. 둘 다 생각하는 자세다. 느낌은 정반대다. 로댕의 조각은 힘겹고 불행해 보인다. 마치 ‘생각 많은 바보’를 보는 것 같다. 반가사유상은 다르다. 편하고 행복한 모습이다”고 말했습니다. 지난번에 귀국할 때는 반가사유상 조각 상품을 하나 구입해 갔습니다. 그는 서양인 최초의 티베트 불교 출가자였고, 지금도 달라이 라마의 절친한 친구입니다.

 제 주위에는 “반가사유상 앞에 10분만 서 있으면 마음이 맑아진다. 세상이 고요해진다”며 종종 박물관을 찾는 동료 기자도 있습니다. 어째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볼 때는 머리가 지근지근한데, 반가사유상을 보면 머리가 맑아지는 걸까요.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수시로 눈이 내립니다. 과거를 보면 아쉽고, 현재는 불만투성이이고, 미래는 두렵습니다. 그런 고민이 때로는 싸락눈으로, 때로는 폭설로 몰아칩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눈발 속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눈[雪]과 똑 닮았습니다. 눈싸움할 때 생각나세요? 두 손으로 눈을 모아 꼭꼭 뭉칩니다. 뭉칠수록 눈은 단단해집니다.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뭉치면 뭉칠수록 단단해집니다. 그래서 로댕의 이 조각상을 보면 답답합니다. 고민을 뭉칠 줄만 알지, 녹일 줄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럼 반가사유상은 어떨까요. 눈발 속에 있긴 마찬가지입니다. 그 역시 생각을 하니까요. 그러나 두 손으로 눈송이를 모으지도 않고, 뭉치지도 않습니다. 생각을 할 뿐, 움켜쥐진 않습니다. 그래서 가볍습니다. 볼에 살며시 갖다 댄 손가락, 오른 다리를 살짝 올린 반가부좌를 보세요. 무게감이 거의 없습니다. 두 조각상에서 느껴지는 무게감. 그게 바로 일상의 무게, 번뇌의 무게, 삶의 무게입니다.

 불교방송·유나방송 등에서 마음의 이치를 전하는 정목 스님이 ‘분노 조절 팁’을 일러준 적이 있습니다. “분노가 일 때 심호흡을 하세요. 종이 분쇄기 아시죠. 그게 내 가슴속에 있다고 생각하세요. 숨을 들이켜며 분노가 들어옵니다. 분쇄기를 통과하며 자동으로 부숴집니다. 잘게 분쇄된 분노를 호흡을 내쉬며 함께 내보냅니다. 내뱉은 분노를 다시 들이마시고, 더 잘게 분쇄하고, 다시 밖으로 내뱉습니다.” “들숨과 날숨을 몇 번만 되풀이하면 화가 착 가라앉는다. 실제 효과가 있다”며 사무실 책상에 이 방법을 붙여두는 사람도 봤습니다.

 이게 왜 효과가 있을까요. 그 이유를 알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도 언제든지 반가사유상이 될 수 있습니다. 짜증이 나고, 분노가 솟을 때 우리는 눈을 뭉칩니다. 화가 나는 이유를 곱씹을수록 눈 뭉치는 더 단단해지죠. 그때 ‘아! 분쇄기 방법이 있었지’라며 생각의 채널을 돌립니다. 실은 그 순간에 눈 뭉치는 이미 녹기 시작합니다. 왜냐고요? 다른 생각(분쇄기법)에 집중해야 하니까, 그전에 하던 생각(분노)을 자신도 모르게 놓아버리기 때문입니다. 박물관에서 반가사유상을 감상할 때도 집중해야 합니다. 이전의 생각을 저절로 놓게 됩니다. 눈은 절로 녹습니다. 생각도 채널만 돌리면 절로 녹습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반가사유상. 둘 다 눈발 속에, 온갖 생각 속에 앉아 있습니다. 왜 유독 반가사유상만 입가에 미소를 지을까요. 그는 펑펑 내리는 눈발이 모두 ‘녹는 눈(녹는 생각)’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가사유상, 그 오묘한 미소의 비밀입니다.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