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근대이후로는 고균 김옥균을 가장 명필로 손꼽는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는 김옥균의 서장품이 극히 드물다.
까닭은 간단하다. 역적으로 몰린 그의 글을 위험해서 아무도 감히 소장하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일본에는 많다. 그 까닭도 간단하다.
망명 중에 있던 김옥균은 생활도 몹시 구차스러웠다. 하는 수 없이 그는 글을 써서 맡아가며 입에 풀칠을 했다.
다행히 그에게는 후원자며 친구들이 많았다. 그가 암살된 직후에 그 추도회가 동경 천초에서 열렸다.
이때 조객들이 장사진을 칠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의 일본 총리대신이 조사를 보내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궁색한 생활을 하지 않아도 좋았겠지만 그의 일행은 13명이나 되었다. 또한 발이 넓은 그의 우거에는 늘 그를 따르는 수많은 서생들이 도식하였으며, 이들에게 그는 돈이 손에 잡히는 대로 뿌렸다.
김옥균이가 소립원도로 이윤과 한 사람을 데리고 쫓겨날 때는 그는 빚에 몰리고 있었다.
지난 6월 동경에서 공개된 김옥균의 친필서한을 보면 북해도로 유배됐을 시절에도 생활은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친필초고의 사본을 보면 진본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다만 그가 이 서한을 정말 보냈고, 또 당시의 흑전수감과 대한외무대신이 받아 볼 수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 서한 속에서 김옥균은 매월 30원씩의 생활비만이라도 보태달라고 간청했다. 당시의 30원이라면 적은 돈은 아니다.
그러나 불세출의 풍운아이자 한때의 일본국의 국빈이기도 했던 그가 이처럼 낙백해졌나 생각하니 새삼 비관을 느끼게 된다.
그가 극도로 궁핍하고 있었을 때 동경의 「니콜라이」정공회사교가 거액의 원조를 해주겠다고 말을 건네왔다. 한반도 경영에 있어 독립당의 수령으로서의 김옥균의 정치적 지위를 이용하려는 「러시아」의 의도가 여기 담겨져 있었다.
그때 견양의가 이를 받아들인다면 한국의 독립을 침해하는 일이 된다고 충고했다는 말이 있다.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김옥균은 이 제안을 거부하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그는 이홍장의 친서를 받고 상해로 떠나기에 앞서 도미를 계획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비마련이 안되어 좌절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에 공개된 서한에 여비 둥은 일절 원치 않겠다는 구절이 있다. 돈 때문이 아니라 그의 행동이 극도로 제한 받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김옥균이가 철저한 친일파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가 청국으로 떠날 때에도 친일파였는지 하는 것은 더욱 의심스러운 일이다.
한·일 합병 후에 그가 공로가 있었다하여 작위를 추증하자는 결의문이 일본의회에 제출됐었다는 것은 이제 보면 몹시 가슴 아픈 희화나 다름없는 것 같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