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 동방학연구소주최 「세미나」발표요지-위당 정인보의 행상에 나타난 몇 가지 문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연세대 동방학연구소는 1일 기독교회관강당에서 제6회 실학공개강좌를 가졌다. 이날 민영규 교수(연세대)는 『위당 정인보 선생의 행상에 나타난 몇 가지 문제(실학원시)』를, 이우성 교수(성균관대)는 『최현환의 고문 비략―이조말엽 중인층의 실학사상』을 강연, 실학분야연구의 미개척영역을 소개했다. 다음은 발표의 주요내용이다.
위당 정인보에 대해서는 연보적으로, 학적 배경에 있어 모두 오해되는 경향이 있다.
연보적으로 『그가 1892년생이고 1910년 중국에 유학, 동양학을 전공, 1918년 귀국했다』는 식의 기록이나. 정만조의 아들이고 정기우의 손자라고 한 인명사전 등의 기록은 모두허위 다.
실인즉 그는 1893년5월6일 서울 명동외가 서씨 댁에서 났으며 선친 은조가 38세, 모친 서씨는 40세 때였다. 낳자마자 그는 유모 강씨에 달려 회동본가 묵조 아래로 입양, 그미망인 이씨 부인을 모셨다. 따라서 그의 조부는 정기년이다.
또 그가 1911년과 1912년에 압록강을 건넌 적은 있으나 그가 중국상해로 유학을 떠난 것은 1913년 2월20일 나이21세 때였다.
상해유학은 잠시였으며 난곡 이건방이 강화에서 서울로 이사온 1908년 봄부터 난곡의 제 자가 되었다.
난곡은 양명학이 강화에 심어진 2백년의 마지막을 장식한 인물로 위당이 난곡의 제자였음은 그의 양명학이해를 설명하는 것이다.
위당의 실학사상도 건방·건창의 실학관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건창은 문장학에 대해 사람으로서의 존엄을 강조하는 생리학을 실학으로 얘기했다. 건방도 역시 신학에 대한 실심실학을 얘기했다. 사람이 권력의 자리에 있어서 동물과 같은 존재로 떨어지는 것은 신학의 영역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1900년대에 신학을 실학으로 부른 것은 정반대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또 위당은 물론 성호·다산 같은 실학인은 반주자학이 아닌 「주자학의 재발견」을 수행한 것이다.
결코 신학이나 양명학에 몰두한 것이기보다 과거를 보는 일조차 가주자학의 일로 본 성리학파인 것이다.
중국의 황종희나 고염무가 모두 왕양명학파의 대가들이나 실상 이들도 주자학에 잠심했던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외주내왕의 가주자학적인 양상을 싫어한 것은 위당 뿐 아니라 스승 난곡도 마찬가지였다. 강화학파의 하곡이 대궐같이 큰 서울 집을 버리고 강화의 골방에서 생활한 것 같은 것은 성리학인다운 면모임을 보이는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