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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피어린 산과 언덕 ⑦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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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피의 능선」을 비롯한 「펀치볼」 일대의 고지 쟁탈전은 피아의 살인적인 화력에 다 장병의 투지로 승패가 판가름나는 인내의 싸움이기도 했다. 그것은 사단이나 군단 규모로 단숨에 몇 백리씩 밀고 나가는 신나는(?) 작전이 아니라 겨우 대대·중대 병력이 접대할 수 있는 협곡이나 산봉우리에서 포탄과 소총·수류탄에다 병사들 육탄이 맞 부닥치는 혈전이었다.
이 같은 처참한 살육전에서 인해전술로 달려 붙는 공산군은 물론 아군도 수많은 전 사상자를 냈다.
사단이 교체되면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우리 장병들 사이에서는 피해를 많이 내고 물러나는 신설 사단이나 전술이 없어 후퇴한 부대는 「공산군 보급 사단」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 통하기도 했다.
이런 전황 속에서 사병들은 각기 자기 사단의 명예를 걸고 고지 점령에 앞다투어 돌격해 나갔다.
「펀치볼」 일대의 격전 상과 이 전투에서의 한미 두 나라 장병들의 전공은 1958년 한국 거제3군이 양구군 동면에 세운 다음의 전적 비문에도 절 나타나 있다.

<전적 비문이 당시 격전상 말해>
『단기4284년 (주 서기1951년) 8월29일부터 10월30일까지 서화리 가칠봉 피의 능선 1211고지 무명 고지 일대를 중심으로 한 이 지구 전투에서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용감히 적을 물리친 국군 제3·제5사단 및 해병 제1사단의 장병들이여! 또는 미제2·제7·제환·제45사단 및 제1해병 사단의 용사들이여! 인류의 평화와 자유의 반역자 북한 괴뢰 제2군단이 평화롭던 이 강산을 피로써 물들이게 되고 조국의 가쁜 숨이 경각을 다툴 때 임들의 몸이 방패가 되어 우리 민족을 살렸고 임들의 홀리신 피는 조국애의 일편단심으로 이 나라를 건졌도다.
여기 일들의 빛나는 충성과 영용 무쌍한 투혼을 천추 만대에 전하고자 이 돌을 깎아 세우나니 비록 이 비석은 모래알이 될지라도 임들의 그 위대한 공훈은 해와 달로 더불어 길이 빛나리다.
단기4291년3월15일 제3군단 세움』다시 이 전투에 참전했던 중대장들과 소대장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이 지역의 오늘의 상황을 현지 주민들로부터 알아보겠다.
▲김인덕씨 (당시 제5사단36연대 제2대대6중대장=중위· 예비역 육군 중령· 47) <우리6중대는 항상 공격 일선에 나서 2대대의 특수 부대 같은 핵심 중대였습니다.
8월18일 새벽5시 피의 능선 3개 고지 중 중앙의 940고지 공격을 개시했지요. 이 고지는 우리 전에 미제2사단이 9번이나 공격을 했다가 실패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적이 공격밖에 할 수 없는 지형인데다가 좌측 983고지에서는 적이 집중 측면 사격을 가해 오는 바람에 우리가 아주 불리한 입장이었어요. 940 바로 밑의 무명 고지까지 올라가는데 3일이 걸렸읍니다.
여기서 불과 적과 30m거리를 두고 이틀 동안을 대치하는데 정말 미칠 것 같더군요.
이틀째 되던 날 밤 할 수없이 적 「벙커」를 쳐부술 결사대를 편성했읍니다. 각 분대서 1명씩을 차출, 5명씩 2개조로 나누어 고지 좌우 측면으로 우회해 올라가 수류탄을 까 넣게 한 겁니다.

<불리한 지형…아군 피해 막심>
출발하기 전 이들의 머리칼과 손톱, 발톱을 잘라서 내가 보관했어요.
30분내로 올라가 공격을 개시키로 하고「리더」 인 오중사에게 시계까지 마련해 줬읍니다. 우리 특공대원들이 기어오르는 30분 동안 고지의 적 「벙커」 에다 집중 포격을 가했더니 적병들은 고개도 못 든 채 엎드려 버리고 수류탄을 못 던지더군요.
포격이 멈추는 순간 우리 대원들이 적「벙커」에 달려 붙으며 수류탄 세례를 가하고 뒤이어 중대 저 병력이 돌격해 올라갔어요.
혼전의 수라장 속에서 적병들은 도망을 치려고 뛰다가 고지 뒷면 초도 경사의 절벽으로 대부분이 떨어져 죽고 말았어요.
기적적으로 특공대원 10명은 부상자도 한 사람 없었고 우리는 이 기습에서 적 포로만도 1백50여명을 잡았어요.
940고지를 점령하고 나니까 연대장으로부터 답보 상태에 있는 제1, 제3대 연의 983과 773고지 공격을 지원하라는 명령이 오더군요.
983고지는 적의 「벙커」들이 모두 전면을 향해 파져 있었기 때문에 940때와 같은 방법의 우리 측면 기습으로 쉽게 점령해 버렸읍니다.
983은 우리가 점령한 후에도 적의 공격을 여러 번 받아 뺐고 뺏기는 치열한 공방전이 되풀이 됐어요.>
▲정창호씨 (당시 5사단36연대 3대대 중대장=중위· 현 대령· 46) <우리 11중대는 983고지의 정면공격을 맡았었습니다.
원래 이 고지는 우리5사단이 교체해 들어가기 전 미제2사단이 2개월 동안을 공격하다 실패하고 나온 곳이었어요.
우리도 처음 몇 번의 정면공격을 해봤지만 도저히 안돼서 2km밖에 안 되는 직선거리를 약8km나 돌아 들어가 우회 공격을 했읍니다.
2개 소대는 정면공격을 시키고 이 보직 소위가 지휘하는 제3소대를 측면으로 올려 보냈더니 적은 정면 방어에만 주력을 하다가 우리 양동 작전에 말려들고 말더군요.>
▲이찬식씨 (당시 제5사단 36연대 제3대대 11중대 3소대장·현 대령·41) <우리 3소대는 제2대대가 공격해 올라간 940고지의 전면 오솔길을 따라 8km나 돌아서 983의 측면으로 기어 붙었읍니다.
고지 주위에는 적의 참호와 교통 호가 바둑판 같이 파져 있었는데 이것들을 하나하나 파괴해 가면서 정상으로 돌격을 해 올라가는데 정말 난공이었어요.
고지 위로 막 뛰어 오르려는데 옆의 호속에 있던 공산군2명이 『국군 동무 어서 오시오』라고 소리를 치면서 수류탄을 버쩍 쳐듭디다.
던지는 수류탄을 되받아 벼랑 아래로 굴려 버리고 육박전으로 달려 붙어 그 적 병사들을 생포하고 보니 중기관 총 사수들인데 발목을 자전거 「체인」으로 큰 바윗돌에다 묶어놨읍디다.
우리가 일단 고지 위로 올라가니까 적들은 저항할 생각도 못하고 후면 계곡을 따라 도망치기에 정신이 없었어요.
미군기들의 기총 소사와 항공 지원을 받으며 패주하는 적병들을 겨눠 쏴 댔는데 지금 생각해도 아주 통쾌했었지요.
이날 밤 우리는 983고지에서 약2km 정도 계곡을 내려가 구축했던 전초에서 적 1개 대대 병력의 반격을 받고 백병전을 벌였읍니다.
시간마다 뺏고 뺏기는 대 혈전 시간마다 뺐었다 뺏기는 공방전을 밤새 되풀이하고 나니 계곡과 산비탈엔 적과 아군의 시체가· 즐비하게 깔렸는데 이 보다 앞서 대대장은 우리 정창호 중대장에게 전초 고지를 포기하고 983으로 올라오라고 했어요.
정중위는 『죽어도 버릴 수는 없다』고 목멘 소리로 대답한 후 혼잣말로『이 고지 하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부하들이 희생됐는데…』 하면서 눈물을 주루룩 흘리더군요.
정중위는 날 붙잡더니 『이 소위와 내가 여기 있음으로써 이곳이 대한 민국 땅』 이니 사수를 하자면서 땅에 팽개쳤던 무전기 수화기를 들고 대대장에게 수류탄 보급을 요청하데요. 나는 애송이 소대장이었지만 정 중위의 이 같은 말에 큰 감명을 받고 각오가 새로워졌었어요.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 전초 고지를 끝까지 방어하는데 성공했읍니다.>
한편 6·25전쟁 중 가장 치열한 격전지 중의 하나였던 「펀치볼」 일대는 현재 그 악몽 같던 전진을 말끔히 씻고 평화로운 마을을 건설키 위해 주민들과 현지 군부대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금도 민통선 이북 지역이긴 하지만 「펀치볼」은 3백65가구 2만 여명의 주민이 들어가 옥토를 경작해 부농의 마을을 이룩, 대표적인 전략촌을 만들고 있다.
▲유지택씨(당시 강원도 인제군 주민·현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영한 고등 공민학교 교장·33) <해안 분지에 민간인 입주가 허용된 것은 1956년부터입니다. 민통선 이북 지역에서는 맨 처음이었어요.
이때부터 「펀치볼」은 전략 촌으로 개발되기 시작해서 지금은 그 옛날의 풍요했던 곡창 지대로 되돌아왔지요.
지금 경작 면적은 1천2백68정보인데 주민의 구성 비율은 원주민이 28%고 외지서 입주한 사람이 72%입니다.
56년에 우리가 입주했을 때 만해도 가칠봉 일대는 옛날의 울창했던 나무와 숲이 6·25전쟁 중의 포화로 다 없어져 버렸고 황토 흙이 무릎까지 빠졌어요.
57년까지는 주민들도 현지 주둔 부대의 일석 점호를 받았고 등화관제가 엄격히 실시됐었습니다.>
▲이금석씨(당시 양구군 해안면 주민·현 인제군 단화면 현리 주민·농업·63) <「펀치볼」일대의 능선들은 5l년6월 「유엔」군이 반격해 온 후부터 휴전 때까지 공산군과 치열한 쟁탈전을 계속하자 늘 화염에 휩싸여 있었어요. 「펀치볼」이란 이름은 해안 분지 일대에 투입돼 싸우던 미군들이 붙인 거예요.

<잿더미 일궈 이젠 옥토 만들어>
이 분지는 일제 때부터 개발된 해발4백7O여m의 고원 분지로 유명한 곡창 지대 였읍니다. 「펀치볼」은 6·25전까지는 공산 치하에 있었는데 외부와의 교적이 단절되다 시비한 곳이었지만 강원도 안에서는 소문난 부촌이었고 주민들간에는 이 마을의 풍요와 평화를 자랑하는 뜻으로 「대한민국」으로 통했었지요.
원래 있던 9백70여 호의 농가는 전쟁 중 모두 잿더미가 돼 버렸고 지금은 완전히 집도 새로 짓고 전답도 다시 개간을 한 겁니다.
유지택 선생님은 1960년부터「펀치볼」주민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고등 공민학교를 세워 오늘까지 운영해 오고 있는데 정말 우리 마을의 산 상록수입니다.
지금도 이곳은 정기 노선「버스」도 없고 민간 차량이 통제를 받아 아주 교통이 불편하고 의료 시설 도 전혀 없어 큰 고통을 받고 있읍니다.
지난여름 동안에만도 병원이 없어 분만하던 임산부가 2명이나 숨지고 말았어요. 지난 67년에도 논 속에서 6·25때 전사한 한 미군의 군번과 해골이 나왔는데 아직도 이런 전흔이 가끔 발견되지요. > ◆주요일지 (1952년5월31일· 6월1∼3일)
※5월31일 ▲「미그」 기 3대 격추 ▲ 「밴풀리트」 사령관, 적 병력은 아군보다 2배나 공세 취하지 못한다고 언명 ▲국회, 김성수 부통령 사표 수리를80대 영으로 부결 ▲ 「아이크」 원수 본국 귀환
※6월1일 ▲국화 각파 대도 개창 처리 논의 ▲ 불군, 월남 중부서 고전
※6윌2일 ▲단복의 능선에서 격전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적기 소각 ▲ 「큘라크 」 사령관, 거제도 수용소 시찰 ▲이 대통령,「유엔」 한 위에 한국 정정 해명 서한 발송
※6월3일 ▲「보트너」 신임 포로 수용 소장, 포로 취급에 강경 태도 ▲기개 지방 의회, 이 대통령에 내각 책임제 개헌안 반대 결의 전달 ▲ 「트루먼」, 이 대통령에 친서(내용은 한국 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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