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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2)<제자 이지택>|<제28화>북간도(2)|이지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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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세와 취락>
북간도는 그리 넓지도 않은 땅이지만 앞서 말했듯 사연이 얽혀있고 지명도 소상치 않다.
초기에는 여기를 대체로 간도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청나라서는 연변이라고도 불렀다.
간도라고 부르는 경우에도 우리 함북접경지대의 이름을 따라 무산건너편은 무산간도, 회령건너편은 회령간도 등으로 불러 종성·온 성의 4구역으로 구분되기도 했다.
사이 섬 즉 간도라고 하는 이름은 두만강 건너에 있으되 그 건너에 있는 해란 강과의 사이에 있어서 하나의 섬 형태로 인식한데서 나온 말인지도 모르겠다. 이 북간도라는 말은 서간 도라는 말과도 구분된다. 따라서 북간도의 가정 계 선을 이야기한다면 북간도란 만주간도성의 혼춘·연길·왕구·화룡의 4개 현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이 넓이는 2만1천 평방㎞나 되어 함경북도 만한 땅이다.
그러니까 서간 도는 무산 서쪽, 압록강북쪽의 송화강 상류 일대의 만주 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서간 도는 경계가 없다.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였던 이 북간도의 지세를 살피면 한마디로 분지의 연속이다. 지세는 희미합통하의 골짝, 해란강 골짝, 동사아하의 골짝과 흑산령 산맥과 두만강의 4구역으로 나누어지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동·서 노야령 산맥과 그 지맥, 흑산령 산맥과 그 지맥에 의해 이루어진 하나의 큰 분지이다.
물론 이 안에 수천, 수만의 구릉이 기복하고 있다.
회령간도에서 동성용가에 이르는 화호리구령에 올라 서북쪽을 내려다보면 수천, 수만 개로 기복 하는 구릉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이 구릉이 모두 개간돼 있는 것을 볼 때는 정말 사람의 손이 여기까지 미치는가 하는 생각에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바로 우리 조상의 손길이다.
종성·회령간도의 논밭은 메마르다. 함북지방의 농토보다는 나은 편이지만 자갈밭이 많아 해란강 주변에 비하면 메마른 땅이다.
가장 큰 젖줄은 희미합통하와 해란강이다. 해란강은 백두산에서 서북으로 뻗은 장백산맥이 흑산령으로 갈라지는 대목에 유명한 청산리가 있고 여기서 동쪽으로 흐르기 시작, 두도구·용정촌을 거치고 희미합통하는 합미파령에서 원류, 명월구·토문자·연길을 거쳐 마반산에서 해란강과 합류, 도문에서 두만강에 합류하는 것이다.
이 강에는 산란기가 되면 연어 떼가 두만강을 거쳐 많이 올라왔다. 어렸을 때 어른들과 같이 여울목에서 밤새운 기억이 난다. 땅은 검은빛이다. 찰흙이라서 폭풍이 닥쳐도 먼지가 일지 않는 것이 특징이었다. 구릉이 많아서 논은 강가 평지에 좀 있을 뿐이고 대부분은 조·수수·옥수수 등 잡곡 농사였다.
이 무렵의 북간도에서 가장 큰 도시는 국자 가였다. 그러나 도시형태에는 이르지 않아 집은 고작 1백20호 6백명 정도였다.
동성용가에 약 80호가 있었고 두도구에 60호로 부락이 좀 큰 것에 지나지 않았다.
장차 자세히 이야기 할 용정·명동 등은 이때 10수호에 불과한 촌락이고 대개는 밭을 중심으로 삼삼오오 흩어져 있었다.
1백20호의 집이 모여 있는 국자 가에는 중국의 무민겸이사부·주향총국·산해세국·경무국 등이 있어 행정을 다루고 있었다. (일본영사관등의 이야기는 추후)
원래 청나라는 광서제 6년(1880년)에 국자 가에 초간 국을 두어 개간을 장려해오다가 29년(1900년)부터 무민겸 이사부를 둔 것이었다.
이 기관은 한국사람들이 보통 연길 청이라고 부르던 것으로 도청과 같은데 대랍자에 분방경력 청을 두고 각지방을 사로 나누고 사 밑에 향을 두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는 우리의 군과 같고 향은 면과 같으나 관할지역이 넓었다.
사장은 물론 청국인 이었지만 향장(향약이라고도 했다)은 가끔 한국인도 임명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향장이 되는 한국인은 별 발하고 호 복을 입으며 장차는 귀화해야 하는 것이었다.
주향 총국과 산해세국은 여러 곳에 민세 분국을 두어 조세를 받아들이는 세무서였다.
조세는 주로 지세였다. 처음들판을 개간하여 밭을 일구었을 경우에는 제일 좋은 땅 1무에 1냥2전, 하급 지는 3적6백문(문)의 세금을 받았다. 1무는 요즘 평수로 따지면 1백70평이었다.
이주한 한국사람들이 처음 밭을 일구어서 세금을 내면 주향 총국에서 부책에 올리고 지 번을 내주었다. 지 번을 얻으면서 소유지가 되는 것이다.
이때부터 해마다 조세를 내지만 1년에 1무에 대해 6백문∼7백50문이 나오고 이를 2번에 나누어 내었다.
또 곡식을 다른 곳으로 실어 내갈 때는 통과세로서 한 섬에 대해 2백문을 바쳐야했고 우리나라에서 간도로 들어갈 때는 소달구지 한대에 얼마씩 받았으나 그 액수는 정해져 있지 않아 길목 지키는 세리나 경찰이 멋대로 받아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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