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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전파매체의 공공성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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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제9회 「방송의 날」을 맞았다. 이날은 우리 나라의 전파가 국제 사회에서 독립된 주체성을 인정받았던 1947년 10월 2일을 기념하고, 방송에 부과된 사회적 사명을 방송인과 함께 모든 국민이 다시 한번 되새겨 보기 위해서 마련된 날이다.
우리 나라에 최초의 「라디오」방송이 시작되기는 일제 치하에서였다. 따라서 나라가 없었을 때도 한국에 방송은 있었다. 다만 「한국의」방송이 없었을 뿐이다.
다른 「미디어」에 비해 비교적 새로운 「미디어」요, 보다 높은 과학 기술의 소산이라 할 전파 「미디어」는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지배층·집권층의 손아귀에서 발전되고 이용되는 예가 잦았던 것이다. 발생사적으로 볼 때, 이것은 방송이 그의 자매 「미디어」인 신문과 전혀 그 궤를 달리하고 있는 점이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방송「미디어」는 그의 동시적 속보성, 식자 능력의 경계를 초월하는 대중성, 청각적 호소에 의한 암시성 내지는 마취성 때문에, 일찍부터 권력을 전단한 자들이 가장 즐겨 독점하려 든 홍보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나치스」독일의 방송이요, 그 또 다른 예가 오랫동안 한반도 상공을 농간했던 일제의 방송이었다.
그렇기에 방송은 그것이 그저 있다는 사실 자체에 긍정적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첫째 그것은 주권을 가진 나라에서 있어야 되며, 다음으로 그것은 그 나라가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나라에서 있을 때 비로소 그 가치가 긍정된다고 할 수 있다.
2차 세계 대전이후 방송의 주역은 점차 「라디오」에서 TV로 옮겨가는 세계적 추세를 보이고 있다. 멀지않아 국내의 TV 수상기 회수가 1백만「세트」를 돌파할 것이 예견되는 한국의 경우도 그 예외는 아니다.
이 같은 시청각의 새로운 전파 매체의 등장과 그의 급속한 보급은 「라디오」만이 지배하던 방송의 옛 시대 보다 더 한층 무거운 방송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제 문제를 우리에게 제기하고 있다. 정치적 피 암시성의 위험에 덧붙여 사회적·문화적 최면성의 위험이 또한 어둠 속에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작금 TV와 관련된 대중 문화의 저속화·저질화에 대해서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음은 바로 이러한 관심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현재 한국의 방송은 강력한 개성과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국영 방송이 그 큰 기둥을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 기둥들은 취약한 광고 시장에 재정을 의탁하는 민간 상업 방송이 제약된 「네트워크」속에 지탱을 하고 있다.
신문 방송이 자체의 존립을 위해서도 광고주의 압력이나 요구를 무시할 수 없는데 비해서, 국영 방송은 이 같은 제약에서 해방된 특전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방송의 공공성, 공공 목적과 공공 이익에 봉사하는 구실을 국민이 제1차 적으로 국영 방송에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할 것이다. 국영 방송은 과연 이 같은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 것인가 깊은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한편 민간방송 또한 그들의 저질성에 대한 둔사로서 흔히 업고 나오는 이른바 「대중의 수준」이라는 것을 사실 이상으로 얕잡아 봄으로써 오히려 시청자들의 외면을 자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한 쪽에서는 전력이 남아 돌아가고 있고, 다른 한 쪽에서는 아직도 호롱불 밑에 침묵의 밤을 지새야 하는 「전파의 소외지역」이 있다는 현실에 대해서 정부 당국자는 유의하고 이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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