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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을 말해주는 낯익으면서도 낯선 풍경|본사 이광표 특파원, 27년만에 본 북의 산하 <첫 발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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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평양=대한민국 신문·통신 공동취재단】29일 하오 2시25분 단절 27년만에 평양 땅을 밟았다. 판문점에서 평양까지 2백21km. 자동차로 3시간55분이 걸리는 지척-. 4반세기동안 막혔던 이 가깝고도 먼길의 장벽을 넘어 대한적십자대표단 일행 54명이 평양에 오는 동안 연도에는 낯익으면서도 낯선 풍경이 깔려 단절의 슬픔이 되새겨졌다. 이날 상오 10시30분 판문점의 판문각에서 북한적십자가 마련한 「차이카」「벤츠220」등 승용차 편으로 달려간 북의 들녘엔 초가을 빛이 완연했고 이날 따라 단풍을 재촉하는 부슬비가 내렸다. 대한적십자대표단 일행은 하오 3시 모란봉이 보이는 동평양 문수리 초대소(여관)에 안착, 여장을 풀었다.

<판문점∼개성까지, 10년은 넘은 듯한 플라타너스 가로수>
대한적십자대표는 상오 9시30분쯤 북한경비병 휴게실에서 입북수속을 마친 대로 방 2개가 있는 판문각 2층으로 안내됐다.
한 방엔 대표와 자문위원들이, 다른 방엔 수행원과 기자들이 들어갔으며 김태희 북한적십자 단장과 주창준 등의 영접을 받았다.
예비회담 때 수석대표와 단장이었던 김연주씨와 김태희는 서로 악수를 나누며 반가워했다.
이때 정주년 대변인이 『조명일 대변인은 잘 있습니까?』하고 김태희에게 묻자 김씨는 『대변인이라서 역시 대변인의 안부를 묻는군요. 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다과로는 과즙주, 오미자차, 포도, 사과 등이 나왔다. 이범석 대한적십자 대표와 김태희 북한적십자 단장은 함께 기자방으로 와 인사를 했다. 안내를 맡은 북한 기자들은 모두 10명이었고 1명이 우리기자 2명을 맡아 평양까지 안내하겠다고 인사해왔다.
일행은 상오 10시30분 판문각 뒤편에서 소련제 승용차 「차이카」(갈매기란 뜻) 「벤츠」220 등 모두 35대에 분승,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건널 때 북한기자 2명이 사진을 찍고 있었고 초소의 군인은 차렷자세로 서서 쳐다보기만 했다.

<유달리 눈에 띄는 나들이 가는 모습들>
철조망이 쳐진 북방한계선을 지나자 배추 무우밭 및 물을 뿌리는 「스프링클러」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길가엔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쓴 표어 『미제를 몰아내고 자주통일 이룩하자』『우리 나라 사회주의제도 만세』『미제의 각을 뜨자』는 등 반미구호가 여기저기 보였다.
길은 「콘크리트」로 포장된 4차선이었으나 개성에 이를 때까지 인도는 따로 없었다.
중앙선표지는 없었고 양옆에 흰색으로 노변표시만 되어있었다.
가로수는 「플라타너스」가 대부분-. 10년 이상쯤 되어 보였다. 개성까지 오는 동안 「트랙터」에 화물적재함을 연결시킨 차량이 서있는 게 드문드문 보였다.
「트랙터」는 보라고 갖다 놓은 것인지 지나가다가 서있는 것인지 전혀 움직이지 않아 알 수 없었다.
개성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부부가 나들이옷을 입고 나들이 가는 듯한 성장한 모습이 여러 번 보였다.
남편은 주로 쥐색계통의 신사복을 입었고 부인은 옥색치마 분홍저고리 차림이 많았다.

<개성∼사리원, 군대식 행진하는 어린이들 집단행동>
10시45분 개성에 도착했다. 오른쪽으로 송악산이 보였다.
개성 초입에 있는 「야다리」는 이름이 「통일다리」로 바뀌어 있었다.
남대문은 잘 보존되어 있었으며 이 일대의 「로터리」는 빨강「샐비어」꽃이 피어있었다.
평양까지의 연변에 있는 「로터리」엔 모두 「샐비어」꽃이 줄지어 있다.
차는 남대문에서 경의가도로 빠졌다.
길 양쪽엔 4층과 5층의 「베이지」색 아파트가 여러 동 있었고 인파는 생각보다 많았다.
길가의 간판은 이발·종합편의(목욕탕 등이 설치된 「서비스)업 시설) 공업상점 정도여서 거리풍경은 단조로왔다. 인파는 종로거리의 절반 정도였다. 왜 사람이 많은지는 알 수 없었다.
남녀가 모두 상의는 흰 옷, 하의는 검은 옷이었다.
여자 옷은 한복이 99%였으며 양장은 극히 드물었다.
옷 색깔은 대부분 같아 마치 제복을 입은 듯한 인상이었다. 인민학교 아동들이 줄지어 행진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아동들은 하얀「샤스」와 검은 바지를 입고 소년단표시의 빨강「네커치프」를 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군대같이 발을 맞춰 걸어가고 있었다. 「룩색」을 메고 있었고 선두에는 빨강 바탕에 노랑 글씨를 쓴 학급깃발 같은 것을 들고있었다.

<길가에 간판 드물어 단조로운 거리풍경>
한「팀」은 50명 정도. 안내인에게 물어봤더니 『소풍가는 것 같다』는 대답이었다. 개학은 9월초일텐데 납득이 안가는 대답이었다. 또 다른 안내원에 따르면 『개학을 앞둔 하계 야영훈련이다』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11시4분 김천에 도착했다. 선두 차에서 끝 차까지 모두 도착하는데 10분이 걸렸다.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지나가는 국민학교 아이들은 비를 그대로 맞으며 걸어갔다.
『봉산에 굉징히 큰 포도원이 있다』고 안내원이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봉산에서 일정 때 가난한 농군의 아들이 포도 한 알을 훔쳐먹고 주인에게 맞아 다리가 부러진 일이 있었는데 해방 뒤 포도밭이 무성해진 뒤에도 농부들은 그때의 설움을 얘기하고 있다』고 이 안내원은 말했다.
봉산을 지나면서 빗줄기가 세어지고 우산을 쓴 행인들이 보였다. 모두 검은 우산이었다. 낮 12시30분 사리원에 도착했다.

<사리원∼평양, 도청이 어디냐 에 무슨 말인지 몰라>
사리원의 인상은 서울의 「캠퍼스」같았다. 건물은 비교적 정연하고 깨끗해 보였다. 제일 전면에 아파트가 서있었고 아파트의 맨 아래층엔 간판이 있었다. 「메인·스트리트」로 올라가면서 폭 10m의 운하가 있었다.
안내원은 『상당히 빠른 시일 안에 개통되어 외국인들이 보고 감탄한다』고 자랑했다.
운하 건너엔 광장이 있었다. 전면엔 본부석 같은 시설이 보였으며 군중대회 등이 이곳에서 열린다는 설명이었다.
『도청이 어디냐』고 물었으나 『도청이 뭐냐』고 안내원은 알아듣지를 못했다.
안내원은 한참만에 말귀를 알아듣고 『도 인민위원회 말이냐』면서 특정 건물을 지칭 않고 『저쪽』이라고만 가르쳐 주었다.
일행을 태운 차는 사리원에서 멎어, 사리원 여관에 잠시 안내됐다.
이 여관은 새 건물로 보였으나 간판은 없었다.
대표단과 자문위원은 2층, 수행원과 기자는 아래층을 차지, 판문각에서와 같은 과일·「사이다」·과즙·떡 등 다과를 대접받았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하오 1시20분 사리원을 떠났다. 사리원에서 황주로 달릴 때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그런데도 소채밭이 있는 「스프링클러」는 계속 돌면서 물을 뿌리고 있었다.
『비가 오면 멈추는 게 좋지 않으냐』고 하자 안내원은 『누군가 조작을 하겠지요』하고 대답했다.
또 다른 안내원은 『농약을 뿌리는 것 같다』는 대답을 하기도 했다.

<황주 사과도 자랑 "모두 먹을 수 있다">
황주는 사과의 고장답게 사과가 빨갛게 익어있었고 인부들이 따내는 모습도 보였다. 안내원은 『김일성 수령님의 「북청교시」이래로 야산을 대대적으로 개발해 사과밭을 만들었다. 모든 인민이 사과를 먹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옛날에 비하면 사과밭이 줄었다는 것이 일행중의 이북출신 인사들의 얘기였다. 하오 1시40분 황주를 통과하고 1시55분 평남도계를 넘었다.
곧 평남중화에 들어섰다. 여기서부터는 「포플러」가 상당히 좋아 옛날 국도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듯했다. 「시멘트」포장이 끊기고 길도 여기서부터는 「아스팔트」였다.
대체로 판문점에서 평양까지는 옥수수 밭과 과수원이 많았다. 평야지대에는 드문드문 『쌀은 사회주의이다』라는 표어가 보였다.
평양 초입에서 약 10m정도 떨어진 도로는 신설된 것이었으며 노폭은 4차선이었고 계속 직선이었다.
도로 양옆은 신 개발지인 듯 경지작업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 길은 동평양 시가의 「청년의 거리」와 연결됐다.

<평양시내, 거리의 양쪽에는 4, 5층「아파트」>
거리 양쪽엔 4, 5층 높이의「아파트」가 보였다.
또 판자 울타리를 쳐놓고 「아파트」공사를 하고있는 광경도 보였다. 멀리 왼쪽 산등성이 너머로 20층이 넘는 듯한 건물이 보였다.
안내원은 김일성 대학이라고 알려줬다.
그 건물 왼쪽엔 서울 남산「텔레비젼」탑과 같은 평양「텔레비젼」탑이 보였다.
안내원은 이 탑 왼편이 바로 평양 도심지라고 설명했다.
일행은 청년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나있는 2차선의 좁은 「아스팔트」길로 들어서 하오 2시25분 평양 특별시 대동강구역 문수리 숙소에 도착했다.
평양에 도착해서 본 승용차의 모양은 「폴크스바겐」비슷했다. 「갱생」이라는 북한산 차다.
거리엔 깨끗한 옷을 입고 나온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은 무표정하거나 무관심한 듯한 얼굴이었다. 자동차 행렬이 지나도 쳐다보지를 않았고 이쪽에서 손을 흔들면 그제서야 손을 마주 흔들었다.
청년거리 버스정류장에서 부인 3명이 처음으로 손을 흔들었다.

<도심지 돌자 제의에 안내원, 말머리 돌려>
밤 11시40분쯤 숙소에서 본 평양 시가지와 대동강변의 풍경은 오락가락하던 부슬비가 그쳤으나 안개가 짙어 시야가 나빴다.
대동강물은 비가 와서 물이 붉은 듯하며 약간 황토색 흙물이었다.
대표단 숙소에서 본회담 장소까지 5km 남짓한 동평양의 밤거리는「플라타너스」와 수양버들 등 가로수들이 백열가로등에 비쳐져 창백한 인상을 주었다.
가끔 차가 질주할 뿐 행인은 많지 않았으며 밤늦게까지 삼삼오오 행인들이 눈에 띄었다.
강 건너 평양의 건물군은 회의장 주변에서 뚜렷하게 바라다 보였다.
특히 혁명박물관은 밤새도록 조명이 되어 유난히 눈에 띄었으며 백열가로등에 환히 비치는 대동교가 가까이 들어왔으나 『도심지대를 돌자』는 우리 기자들의 제안을 받은 북한 안내원은 『밤도 깊었으니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것이 좋지 않으냐』면서 말머리를 돌렸다.

<대표단 초대소, 수카르노 대통령 등 귀빈들이 머물던 곳>
대표단 및 수행원 일행이 첫 밤을 지낸 평양시내 문수리 초대소는 동평양 구릉지대의 숲 속. 숙소건물 전체의 인상은 마치 별장이나 사원 같기도 하고 우리 나라의 「아카데미·하우스」비슷하기도 했으나 「아카데미·하우스」만큼 돈을 많이 들인 것 같지는 않았다.
처음 평양의 「메인·스트리트」를 지나지 않고 이곳에 들어갈 때는 마치 서울의 잠실대교∼천호동의 2차선을 지나 민가도 없는 개발지역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숙소는 자그마한 산언덕을 깎아 새로 지은 것으로 앞에는 조촐한 정원에 잔디가 심어져 있다.
숙소 바로 앞에 「콘크리트」보도가 있고 그 가장자리에 3m 높이의 가로등이 세워져 있었다.

<숙소에서 5m쯤 가면 대동강 능라도 보여>
남동쪽으로 난 문을 나서 5m쯤 내려서면 수양버들이 늘어선 산책도로가 나타나고 그 서쪽으로 대동강 능라도 수원지 등이 보인다. 서쪽 건너편에는 깎아지른 듯한 청류벽이 있고 그 위로 올라가면 을밀대가 있다.
이곳에서는 「수카르노」(63년)「인도네시아」 전 대통령과 「카스트로」(65년) 쿠바수상이 묵은 일이 있다.
숙소의 각방에는 2명씩 들었는데 기자들의 방에는 약간 딱딱한 나무침대 2개에 녹색 인조공단「커버」에 하얀「시트」를 깔아 비교적 깨끗이 보였다.

<방마다 일제냉장고 화장품까지 늘어놔>
방바닥에는 돗자리가 깔려있고 방 한 모퉁이에는 일본 「히다찌」제 소형냉장고가 놓여있고 그 안에 맥주·달걀·「사이다」등이 있었다.
방「커튼」은 엷은 미색, 방마다 「라디오」가 1대씩 놓여있고 서울 KBS방송을 들을 수가 있었다. 이밖에 자동식 구내전화 1대가 있고 수세식 화장실과 목욕탕이 구비되어 있었다. 화장실 거울 앞에는 향수·치약·칫솔·「로션」·비누·수건 등이 놓여있었다. 벽과 천장은 하얀「페인트」로 칠해졌고 목제 옷장 1개와 「테이블」·의자 2개가 놓였다. 복도에는 빨간「카페트」가 깔렸다.
점심은 대표단과 자문위원은 대표단이 들어있는 건물의 2호동에서, 기자들은 3호동 1층에서, 수행원들은 3호동 2층에서 각각 나뉘어서 먹었다.
엷은 보라 빛과 연분홍 치마저고리를 입은 아주머니들이 나와 접대를 해주었는데 대표단의 식단에는 빵, 「버터」, 새우튀김, 송이, 불고기, 생선전, 백반, 만두국, 오미자, 「사이다」, 인삼주, 맥주 등이 나왔다.
기자들에겐 백반, 만두국, 불고기, 닭찜, 새우튀김, 숭어조림, 모래무지 등이 나왔다. 숭어와 모래무지는 대동강의 명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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