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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다가온 남북적십자회담 48년… 남북협상 길에 올랐던 인사들의 회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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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민족자주연맹 의장이었던 김규식 박사를 수행한 그의 비서처장 송남헌 씨(58)일행이 평양을 향해 서울의 삼청장을 떠난 것은 48년 곡우를 막 지난 4월 21일 상오 6시, 아직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때였다.
당시 이들의 입북을 둘러싸고 국내 각 사회단체에서는 찬 반 양쪽의 성명을 거의 매일같이 내는 한편으로, 이틀 전인 19일에 서울을 떠난 김구 박사 일행도 북행을 반대하는 학생「데모」대를 피해 새벽녘에 뒷문으로 슬그머니 빠져나가다시피 떠난 터였다.
종로경찰서 경찰관 4명의 호위를 받은 김 박사 일행 20여명은 삼청장을 나와 광화문 서대문을 거쳐 지금의 통일로를 달려 임진강에 이르렀다. 차를 달리면서 자세히 보니 연도 곳곳에 경비 경찰관들이 서있다가 일행이 지나가면 「받들어 총」으로 인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개성을 지나 38선상의 여현에 도착한 것이 이날 정오쯤. 여현은 역을 중심으로 남북 쪽으로 각각 50m지점이 완충지대, 지금의 비무장지대와 같이 각각 남·북의 경비병들이 자기지역을 맡고 있었다.
도착 즉시 평양으로 가려 했지만, 일행의 도착이 늦는 바람에 대기하고 있던 특별열차가 돌아갔다는 것이다. 남천에 가야만 탈 수 있다는 안내원의 대답에 따라 여러 시간을 기다리다 「발바리」라 불리는 소제「지프」를 얻어 타고 남천에 도착, 22일 상오 1시에야 특별열차에 오를 수 있었다. 객차를 특별히 개조한 열차는 가운데에 큰 응접대를 놓고 주위에「쿠션」이 좋은 의자를 놓았었다. 안내원들이 어찌나 친절하게 대하는지 일행은 과자와 음료수를 마셔가며 거의 온밤을 새다시피 지루함을 몰랐다고 했다.
일행은 22일 상오6시 평양역에 내렸다. 곧 안내원의 지시대로 시내 각 여관에 분산되었다. 송 씨는 김 박사를 모시고 당시 제1급이었던 특별「호텔」에 묵었다.
이곳에는 하루 전에 이미 도착한 김구 박사가 2층 끝 방에 있었고 홍명희(당시 민주독립당 당수)가 이웃에 묵고 있었으며 아래층에는 이들을 수행한 김신·선우진·권태양·엄항섭·조완구씨 등과 기자로는 유일하게 조선통신의 최명소가 함께 머물렀었다.
여장을 푼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밖에서 호루라기소리가 요란스럽게 나고 왁자지껄했다.
창 밖을 내다보니 삼엄한 경비병들에 둘러싸여 한 사람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김일성이었다. 「올백」머리에 국방색 옷을 입은 김일성은 김두봉의 안내로 맨 처음 김규식 박사를 찾아『원로에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면서 짐짓 공손한 채 인사를 나눈 뒤 김구 박사·홍명희 등과도 차례로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19일부터 모란봉극장에서 계속되고 있는 이른바 전 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는 이미 3일 동안의 회의를 거듭해 폐회를 앞둔 결정서(요즘의 공동성명서와 비슷) 문안기초작업에 들어간 때였다.
25일 상오 11시 일행은 평양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환영시민대회에 참가했다. 2층「발코니」에 마련된 귀빈석에는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등으로 공교롭게도 김씨 성만이 모인 셈. 북쪽은 그들의 군대를 비롯, 청년단체·여성동맹·학생 등 34만명을 동원, 마치 영화장면에서나 보듯 이상한 걸음걸이로 사열대 앞을 지나며 행군의 연속장면을 벌였다. 어느 단체이건 귀빈석 앞을 지날 때마다 일제히 오른손 주먹을 치켜들며『만세』를 거듭 외쳤다. 이들은 『만세』의 끝 음을 이상하게 올려 일행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이 모란봉극장 옆 조선인민위원회 회의실에서 그들이 베푼 초대연과 밤늦게 최승희무용단의 무용관람이 있었다.
우리 쪽의 두 김 박사는 술잔을 들고 점잖이 서있었던 것에 비해 당시 그들의 소위 인민회의 의장이었던 김두봉 등은 큰 맥주 잔 같은 데에 사과「브랜디」를 연거푸 마시고 있었다.
회의를 마친 일행은 이른바 그들의 간부를 양성한다는 만경대학원과 김일성대학·국립영화촬영소·겸이포제철·곡산공장·평양교외에 있는 김일성의 할아버지 집 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구경시켜 주어 끌려 다니다시피 따라다녔다. 국립영화촬영소에서는 영화배우 문예봉과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남쪽 일행이 귀로에 오른 것은 입북 보름만인 5월 5일. 모두 기차로 여현까지 가기로 되어있었는데 하루 앞서 내무성의 간부가 급히 찾아와 철도를 폭발해 두 김 박사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있다며 이들을 일행과 분리해 비밀리에 자동차편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그들의 내무부 부국장이란 자가 3명의 경비원과 함께 자동차 2대로 두 김 박사·김신·선우진·송남헌씨 등 5명을 안내해주었다.
정오쯤 황해도 평산의 정방산성 근처에서 사리원 평야를 바라보며 싸가지고 온 점심을 먹었다.
경호원들은 자기네 것이라면서 상표없는 맥주까지 꺼내놓고 분위기를 돋우려 했다.
24년만에 다시 대화를 나누러 평양에 간다는 소식에 송남헌씨는 또 다른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첫 대화를 나누러 떠났던 때는 곡우가 지나 모란이 파란 초여름이었는데 이제 누렇게 익어 가는 벼이삭을 바라보며 다시 남북을 다니는 것은 뜻 있는 일이다. 지금이야말로 대표단의 대화가 꼭 성공되도록 온 국민이 단결하고 민족의 예지를 보여야 할 때』라고 말했다. <정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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