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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Y부대(2)유격전(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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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훈련을 마친 대원들은 출동의 날을 하루를 삼추 같이 기다렸다.
1951년4월29일 문천·안변·경성·회양 지구에 공작대원 1백4명이 침투해 들어감으로써 Y부대는 첫 출동을 개시했다.
사지나 다름없는 적 후방을 들어가는 대원들이었지만 모두가 자신만만했고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앞을 다투어 출동하려 했던 대원들은 출동자 호명 때 누락되면 크게 실망하고 울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전쟁」이라는 위급한 상황은 출동하는 대원들에게 충분한 훈련의 시간을 허락지 않았다. 그러나 귀환을 원칙으로 하지 않는 대원들의 「결사」의 혼은 일기 당천의 기백으로 적지를 향했다. 51년4월말부터 9월에 걸쳐 동해안전역에 침투한 Y부대는 현지에서 본 대원의 몇 십 배나 되는 반공청년들과 우익인사들을 포섭, 52년 말까지 작전을 벌여 다대한 전과를 올렸다. 4천8백 여명의 적 인명피해를 줬고 내무서·국영백화점을 비롯한 각종 기관건물 60여 개를 파괴했으며 수많은 후방시설과 보급로를 기습 파괴했다.

<함북 명천 대화동 이틀간 점령>
이 같은 전과는 작전 후 촬영한 항공사진과 현지에서 보내온 무전에 의해 확인된 것들이었다.
그러면 당시 Y부대 작전참모의 얘기를 들어보겠다.
오용호(당시 Y부대본부 작전참모·현 사업·49)<부대조직은 영도의 총사령부와 현지 작전을 지휘하는 전투사령부가 있었어요.
작전 전개지역은 갑산·예산·단천·길주·명천·경성 등 함경남·북도일대가 중심이 됐고 부대기지의 거점은 활기봉·설령·관모봉·오봉산 등으로 잡았습니다.
작전을 위한 본대가 잠입하기 전 반드시 10∼15명으로 편성된 공작대가 먼저 들어가 유리한 지형에 거점을 확보하고 정보를 수집했어요. 거점확보가 끝나면 출동할 본 대원들은 항공촬영에 의한 거점지형과 비슷한 곳을 영도 안에서 골라 맹렬한 훈련을 시켰어요.
투하 훈련과 독도연습을 마친 전투부대 원들은 작전지역으로 잠입해 들어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영도본부와의 모든 연락은 각 부대에 배치된 무전 사들이 맡아했고 기타의 연락신호는 「플래쉬」를 허용했어요.
본 대원의 투입은 7, 8월의 신록 기를 이용했는데 유격활동의 거점이 대개가 험악한 산악이고 광산지대여서 무전이 잘 안 통해 보급품의 투하나 기타 연락에 아주 애를 먹은 일이 많았어요.
각 부대의 증원 요청이 있을 때는 본부는 즉각 충원을 해 줬어요. 대부분의 부대가 1∼2차의 증원을 했고 어느 부대는 4차에 걸친 증원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전투부대 총사령관은 최제부(전사)동지가 맡아봤고 예하에 청룡·백호·황룡·오봉산 관구가 있었어요.
51년9월6일에는 최제부 사령관이 지휘하는 청룡·백호관구 부대가 함경남도 혜산군 대화동을 2일간 점령하고 군중 대회까지 열었어요.
9월24일에는 최신 동지 외 41명의 대원들이 함남예산군 중장리에서 괴뢰군 대대병력을 기습해 2백20여명을 사살하는 등 9월초부터 각 부대는 본격적인 작전을 전개했어요.>
부대창설에 공이 컸고 영도총본부에서 모든 작전을 총지휘하며 때로는 직접 현지 부대에까지 출동했던 한철민 대장의 얘기를 계속 들어보자.

<나는 투입됐던 8백 여명의 대원중 생 환자는 26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모두가 전사 또는 실종된 것을 생각하면 죄의식에 사로잡힙니다. 귀환을 원칙으로 하지 않는 결사대원들이었지만 너무도 비참한 희생이었습니다.
우리 유격활동의 주목적은 비정규군으로서 적 후방을 교란시키고, 보급로 등을 차단하는 전략적 작전을 전개하면서 현지에 잔류해 있는 반공청년들을 규합해 후방봉기를 하려는 거였어요.
그래서 작전계획도 51년 겨울을 현지서 월동하고 52년 봄부터 다시 유격전을 계속하려는 장기적인 것이었어요.
대원들의 출동에는 미군 기를 이용한 낙하산투하와 미 군함 편을 이용한 해상침투의 두 가지 방법을 사용했어요.
작전계획은 침투할 부대자체에서 계획하고 필요한 장비도 알아서 요청하면 본부서는 전체적인 통합조정만 했습니다.

<출동엔 미군 낙하산 투하이용>
각 부대는 본부나 현지사령부와의 종적인 연락만이 가능했고 부대간의 횡적인 연락은 전혀 불가능하게 해놨어요. 그러니까 자기 부대이외의 타 부대는 어느 지역에서 무슨 작전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어요.
이것은 만약의 경우 포로가 생겨 적에 정보가 새어나가도 다른 부대는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거였어요.
Y부대의 경리·재정·보급 등의 모든 물질적인 문제는 일체를 미 고문관들에게 맡겼습니다. 고문단 측에서는 보수문제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묻습디다.
나는 조국을 위해 나가 싸우는데 보수를 누구한테 받는단 말이냐고 딱 잘라 거절하면서 사지를 향하는 우리들에겐 한푼의 돈도 필요치 않으니 염려치 말라고 했어요.
우리에겐 오직 충분한 무기와 보급만이 필요할 뿐이라고 했더니 고문관들은 감탄스러운 표정을 짓습디다.
대원들은 입대 시 일체의 보수나 대가를 요구치 않는다는 서약을 했었어요.
대원들의 대우나 신분문제는 아주 미묘했습니다. 대우문제를 미 고문단 측에 얘기하면 늘 돈으로 보수를 주어 해결하려고 해요. 당초부터 돈과는 거리가 멀었던 우리는 번번이 실망을 하고 돌아섰어요. 급기야는 미 고문단 측서 신태영 국방장관한테 얘길 했어요. 신 장관은 영도부대를 시찰하고 대한민국에 이런 부대가 있느냐면서 Y부대원들의 법적 신분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약속했었어요.
그러나 결과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해서 유야무야로 끝나고 말았어요.>
Y부대는 1951년9월 해안선일대의 단기작전을 수행하고 침투한 육상부대에 집중되는 적의 토벌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해상 대를 별도로 조직했다.
해상 대는 별도의 특수훈련을 받고 특히 육상부대가 월동에 들어가면서 심한 적의 공격을 받는 동안 해안선일대를 침투해 치열한 작전을 벌였다.
박기주(당시 Y부대 해상대원·현 강원도 속초시서 대서업·44)

<나는 1.4후퇴 때 남하해 거제도서 y부대에 입대했어요.< p>

<1㎞왕복 수영...해상 대 조직>
내 향토를 탈환하는데 앞장서야겠다는 신념을 갖고 동지8명을 규합해서 장승포 99수용소로 들어갔습니다.
1주일간 휴식을 시키더니 목선을 한 척 내주면서 배를 저어보라고 합디다.
우리 9명은 모두 실기시험에 합격을 해 두 달 동안 지심도 훈련소에 오가는 요원들과 부산으로 나가는 신입대원들을 수송해 주었어요. 우리 9명은 4월말 영도 본부로 들어갔습니다.
하루는 아침점호시간에 1㎞를 왕복 수영할 수 있는 사람은 나와보라고 하데요.
우리 9명이 나갔더니 미 고문관이 수영복을 주면서 영도 앞 바다에서 수영을 시켜봅디다.
1㎞를 왕복하고 오니까 「텐트」를 따로 주면서 특별대우를 해주기 시작하더군요.
2주일쯤 지나니까 고무「보트」13개를 가져오더니 노 젓는 훈련을 시킵디다.
소위 이것이 해상대의 전신인 「보트·그룹」이란 거였어요.>
미동훈씨(당시 Y부대 정보참모·현 사업·51)<작전전개는 투입전 입수한 미군항공사진에 의한 정보를 가지고도 했지만 대부분 현지에 들어가 수색해서 얻는 가지고 했습니다.
작전 후 영도 본부에 들어온 무전에 의한 전과보고는 반드시 미군항공기들의 항공사진으로 재확인했어요.
현지에서 도저히 우리 유격대 단독으로 접전할 수 없을 때는 본부에 연락하면 언제든지 즉각적으로 미 해·공군의 지원을 받아 합동작전을 전개했어요.
우리 요구가 있기만 하면 동해안의 미군 구축함·순양 함들이 즉각 동원돼줬고 미군전투기들이 곧 날아와 줬어요. 아주 신기할 정도로 협동이 잘 됐어요.

<북괴, 「오가작통」으로 저지 꽤해>
작전이 치열해지자 괴뢰군은 정규군은 물론 내무서원과 자위대원들로 토벌대를 구성하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대응해 옵디다. 북괴는 「오가작통」을 만들어 우리 유격대의 출몰신고에 연대책임을 지우면서 국민들을 들볶아댔어요.
또 우리대원들의 탈출로를 차단키 위해 각 어향의 배들은 밤만 되면 노를 인근부락 당 간부 집에 보관시켜 놓았어요.
귀환이란 우리 대원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최후인 경우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51년 말에는 전선의 괴뢰군 1개 군단이 우리 유격대를 토벌키 위해 후방으로 차출되더군요.
이렇게되자 우리는 혼성부대의 대 작전을 중단하고 각 지역단위로 소부대의 「게릴라」전을 전개키 시작했어요. 적은 동해안 일대의 후방이 심히 교란되자 한철민 대장 체포에 50만원의 현상금까지 붙었어요. 한 대장이 잠입했다는 소문이 나돌아 체포현상금에 대한 선전벽보가 곳곳에 나붙었다는 무전이 한동안 매일 영도 본부로 날아들어 왔어요.
51년11월5일에는 북괴는 소위 관대 법령이란 걸 발표해 우리유격대원들의 귀순을 획책했어요. 자수하는 유격대원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며 모든 것을 면책시켜준다는 이 법령은 대원들의 웃음거리밖에 안됐어요.>
주요일지(1951년11월18·19·20·21일)
※11월18일=적「미그」기, 북괴비행장서 처음 이착륙, 휴전회담 31차 합동 분위, 전시생활 개선 법 공포
※11월19일=UN군, 연천 서방서 중공군 대대병력 격퇴, 「이든」영회상, 한국의 외국군 철수문제 토의할 용의를 천명
※11월20일=고성남방서 백병전, 국방부, 학도훈련대비 예비역장교를 등록, UN사 공산 측 30일 기한부 휴전 수락해도 지상전계속을 경고
※11월21일=미 국방성, 한국전에서의 미군사상자수 발표, 「밴플리트」장군 서울시 명예시장 추대, 「빈덴버그」미 공참 총장 중공공군증대 우려 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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