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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인생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파스테르나크」의 『의사 지바고」에 이런 말이 있다. 『인간이란 살려고 태어난 것이지 사는 준비를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일전에 「버스」에서의 사건이다. 엄마 등에 업힌 생후 6개월밖에 안되어 보이는 아기가 필자의 안경을 쳐서 떨어뜨린 일이 있다. 엄마의 즉각적인 반응은 사과보다 먼저 아기를 때려주는 일이었다. 아기는 울음을 터뜨렸다. 또 이런 일이 있었다. 창경원 동물원에 아이들을 데리고 구경을 갔었는데, 어떤 엄마가 미아가 된 아들이 어디선가 울고 서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반가와 하기는커녕 우선 『어디에 혼자서 쏘다니느라고 에미 속을 태우느냐?』면서 보기 좋게 갈겨댔다. 아이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이런 일도 봤다. 노상에서 부자가 마주쳤다. 아버지가 『너 어딜가니?』하고 물으니 아들 녀석은 묵묵 부답 『야, 어딜 가느냐 말이다.』『엄마 심부름가요.』『넌 공부나 할거지 다 큰 녀석이 엄마 심부름이냐?』 그렇게 하고 부자는 멋적다는 듯이 헤어졌다.
도대체 이게 뭐냐? 철부지 아기를 설명도 없이 때리는 부모, 공부나 할 일이지 무슨 심부름이냐 하는 부모, 내 자식 내가 때리는데 댁에서 무슨 참견이오 하는 부모.
아이들에겐 「인생」이란 것이 없단 말인가? 미숙하다는 것은 결코 무가치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리다고 하는 것은 결코 불완전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아이들도 그들 나름의 인생이 있고, 생활이 있다.
「텔리비젼」은 있으나 공부방이 없는 가정이 있다. 더구나 공무 책상조차 없는 집이 있다. 통학시간에 시내「버스」속에서 아우성치는 꼬마들을 볼 때마다 애처롭고 가엾고 때로는 분노를 느끼게 하는 때가 있다. 왜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을 좀더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는 것일까? 학교교실 「도어」의 손잡이조차도 어른들의 신장을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시장에서 아동복 하나를 사려도 진짜나이보다 서너살 더 불러야 옷의 「사이즈」가 맞다. 도대체 아이들이란 껌이나 과자 팔 때에는 「왕」으로 뵈고 골목길에서 놀 때에는 귀찮은 존재로 뵌다는 말인가? 아동이 우리 생활 속에 중요한 한 「멤버」로서 인정을 못 받고있으니 우리의 장래가 염려스럽다.
반면에 이런 경우도 있다. 아이들이란 오로지 「신의 영역」에 속하는 미래라는 마력 때문에 「오늘」「여기」서의 생활을 잃고 있다는 점이다. 「그따위로 공부해서는 일류대학은커녕 일류고등학교도 못 가」「공부하라 공부하라 공부하라!」「출세하려면…」「일류고교 가려면」「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그러다 보니 「오늘」의 알차고 보람있는 「생」을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기약할 수도 없는 미래를 위해서는 오늘을 희생해도 좋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는 한 아동들은 건전하게, 건강하게 성장할 수가 없다.
그들에게도 「인생」이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인생」을, 「생활」을 회복시켜주자. 「공부」에서, 잔소리에서, 너무도 부담스러운 명령과 금지에서, 혹사와 협박에서 해방시켜주자. 오늘을 튼튼하게, 건전하게 살고 자라는 아이에게 미래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교육이 극단적으로 「미래지향적」이기 때문에 오늘을 사는 아이들을 더욱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아이들이란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지 사는 준비를 하는데 인생을 허송하도록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김재은<이대교수·교육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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