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미국의「이름」지닌 시인"|노벨 문학상 수상자「네루다」,「휘트먼」에 대해 새 평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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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71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칠레」시인 「파블로·네루다」(현 「프랑스」주재「칠레」대사) 가 최근 「파리」에서 열린「펜·클럽」만찬회에서의 연설을 통해 미국의 민족시인「월트·휘트먼」(1819∼1892)에 대한 그 나름의 새로운 평가를 제기했다. 「네루다」는 이 연설에서 그 자신「휘트먼」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고 모든 사회적 현장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휘트먼」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휘트먼」에 대한 「네루다」의 연설요지이다. <편집자주>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인간은 많은 변화를 겪어 왔다. 「페니실린」이 발명되었는가 하면「텔리비젼」이 발명되었고 인간의 달 착륙이 가능해졌다. 전쟁분야에서도 「네이팜」탄이 발명되어 인류를 재로 만들 수 있는 수단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지난 수세기 동안 인간의 두뇌는 발전을 거듭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부와 빈간의 관계는 고통과 자만, 부당성과 생존권의 복합성을 계속 시점 왔다.
이러한 싯점에서 우리가 서로 각자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인식하여야 하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든지 작가들을 무겁게 압박하고 있는 「정신적 부채」를 계속하여 재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주대륙의 남반부 작가들-나와 같은-은 언어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북반부 문자세계의 굉장한 성장을 의식하고 찬탄하면서 성장해 왔다. 우리는 특히「드라이저」의 시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힘을 전개시켜 온 소설의 놀라움에 대해 크게 영향을 받아 왔다. 격동적이며 구조적인 힘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그 새로운 힘은, 그 위대성과 맹렬 성으로 해서 현대문학에 있어서 그 어느 것도 필적할 수 없는 것이다.
현재 70세에 이르고 있는 나의 입장을 이야기한다면 나는 불과 15세 때「월트·휘트먼」을 발견했고 나는 그를 나의 가장 위대한 채권자로 생각했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그 동안 내가 항상 나를 존재하도록 해준 그 위대하고도 놀라운 채무를 지녀 왔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는 나 자신이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는 「페이스」로 대지를 활보했던 시인의 비천한 종이란 점을 인식하면서 얘기를 시작해야겠다. 그 시인-그 서정적인 「모럴리스트」는 그 자신을 위하여 거친 길을 선택했다.
그는 격렬하면서도 교훈적인 양면을 지닌 시인이었다. 솔직히 말한다면 그는 도덕적이라든가 비도덕적인 문제에 대해 아무런 두려움도 갖지 않았다.
「월트·휘트먼」은 최초의 전체주의적 사상을 지닌 시인이었다. 그의 시작의 의도는 단순히 시를 읊조리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국가간의 관계에 대한 그 자신의 전체적이며, 폭넓은 「비전」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식시키는데 있었다. 그는 그 자신을 행복과 슬픔의, 발전된 문화와 보다 원시적 사회의 채무자로 간주했던 것이다.
나는「스페인」어의 시인이지만 「휘트먼」은「스페인」의 「세르반테스」가 가르쳐 준 것 이상으로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결국 우리는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가 어떻게 성장해 가는가 바라보면서 계속하여 「휘드먼」적인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월트·휘트먼」은 진정한 지리학적 개성의 주인공이었으며 역사상 진정한 대륙적인 미국의 「소리」로 말한, 진정한 미국의「이름」을 지닌 최초의 시인이었다.
이 시대에 우리는 다른 새로운 국가, 다른 새로운 문학, 그리고 새로운 깃발들이 어떻게 인간이 기대하는 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의 식민주의의 소멸』에 합치되는가를 바라보고 있다. 「아프리카」와 미국의 검은 작가들은 이제까지 침묵을 지켜 온 불운한 민족들의 진정한 맥박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인간의 자유는 때로는 출혈을 요구할는지도 모르나 그것은 항상 노래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인류의 노래는 이 고통과 자유의 시대에 있어서 날이 갈수록 풍요해지고 있다. 그런 뜻에서 「휘트먼」의 시는 새삼 새로운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뉴요크·타임스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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