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미국 이민 갔다 다시 돌아오고만 작가 장덕조 여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지난 2월 이민설 속에 도미했던 작가 장덕조 여사가 18일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미국은 참 좋은 나라였어요. 거기 살고 있는 아들딸들은 효도를 다해 늙은 엄마를 모셨고요. 그런데 글이 써져야지요. 글이 한 줄도 안 나오는군요. 효도도 좋고 미국의 풍요도 좋지만 작가가 글을 쓸 수 없으니 어떻게 하루인들 더 있겠어요.』
장 여사는 『쪽 떨어진 소반 상을 놓고 원고를 쓰던』 익숙한 분위기를 찾아 서울로 오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미국에는 은행원인 장남 박원형씨(35)를 비롯, 우형·주형·보형씨 등 네 아들과 따님 영애씨가 살고 있으므로 장 여사는 그들의 간절한 초청을 받아들여 자녀들과 함께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을 했었다고 한다. 서울의 살림살이를 모두 정리했고 미국에 가서 쓸 6·25와 순교사를 소재로 한 작품을 위해 방대한 자료를 모두 부쳤었다. 「뉴요크」의 아드님 원형씨는 미국 작가의 서재를 여러 군데 가본 후 어머니의 서재를 2층에 꾸며 놓고 책장 위엔「파커」만년필까지 얹어 놓은 채 어머니를 맞았었다.
『그 화려한 서재에만 들어가면 글이 딱 막히니 답답한 노릇이지요. 처음 한 달은 소재가 환경과 너무 동떨어진 때문에 글이 안 나오나 보다 하고 현지의 소재들로 다른 작품을 먼저 써 보려고 여행도 하고 「우먼·리브」도 취재하고 열심히 노력했지요. 그러나 역시 안되었어요. 미국에 적응해 자기 일을 하기엔 너무나 늦은 나이구나 깨달았죠.』
자녀들은 『그러면 은퇴하면 되지 않느냐』고도 했고 『여생을 우리와 함께 보내시겠다고 오셨으니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라』고도 하면서 어머니를 붙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59세의 어머니는 『나는 노후를 편하게 살려는 늙은이가 아니다. 나는 작가다. 그리고 나의 여생은 얼마 안 남은 탄환과 같아서 낭비할 여유가 없다』고 짐을 싸 들고 일어서 버렸다.
『자료들을 충분히 가지고 갔고 친구나 돌아다닐 곳도 없었으므로 서재에만 박혀 한 5년 글을 쓰면 전사 장편 2개쯤 완성 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두 달에 끝장을 내고 왔으니 떠날 때 전송해 준 친구들 보기가 부끄럽기도 해요.』
경애·신애씨 등 두 따님이 있는 서울에 돌아와 북아현동의 경애씨 집에서 하루를 지낸 장 여사는 『벌써 글이 써질 듯하다』고 즐거워했다. 『돌아오는 길에 일본서 「가와바다」씨의 자살 「뉴스」를 들었는데 「노벨」상 수상 이후 한자도 작품을 쓰지 못했다는 설명을 들으니 너무도 죽음에 대해 공감이 갔다』고 말하기도 한다.
미국의 젊은이들이 누리는 자유, 바지만 입은 사람도 웃저고리만 입은 사람도 모두 받아들여지는 포용성, 무질서 속에서의 질서, 『구두도 잇솔도 「우먼·리브」도 부드럽게 만드는』 악착스럽지 않은 풍토, 그리고 풍요한 산림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장 여사는 『많은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 사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나는 서울이 더 좋아 돌아왔지만 다른 나라가 더 좋은 점도 많으니까요』라고 말한다. <장명수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