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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과 북촌 사이 예술이 흐르는 섬 섬 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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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호 09면

1 서울박스에 설치된 서도호 작가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2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외관.

수많은 제약과 논란 때문에 거의 ‘불가능한 과제’로 여겨지기까지 했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4년여의 공사를 마치고 서울 심장부에 13일 드디어 문을 열었다. ‘현대’ 미술관이지만 동시에 미술관 터의 ‘과거’까지 끌어안았다. 조선시대 종친부 건물과 근대 건축인 옛 국군기무사령부 본부를 아우르고 나지막한 건물들과 사이사이의 정원들로 구성된 ‘군도(群島)형 미술관’이다. 전체면적 5만2125㎡(약 1만5768평)의 대형 미술관이지만 서쪽의 경복궁을 내리누르지 않는 얌전한 모습이다. 경복궁 돌담길을 걷다가 마음 내키면 불쑥 들어갈 수 있고, 이는 동쪽의 북촌 거리나 북쪽의 삼청동 길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몇 년간 ‘랜드마크’임을 내세우며 세워진 건물들이 주변과 충돌하는 튀는 디자인과 역사적 맥락을 무시해 비난받은 것과 대조적이다. 이제 관건은 보기 드문 도심 속 대형 미술관을 어떤 콘텐트로 채워 문화의 허브 역할을 수행하게 할 것인가에 달렸다. 5개의 개관 특별전은 이 질문에 대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첫 번째 대답이다.

13일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가보니

3 미술관 중정 잔디밭. 이우환 작가의 작품이 보인다. 돌들이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겉은 아담, 속은 거대 … 사통팔달 접근성
“세계적으로도 이런 미술관은 흔치 않습니다. 이렇게 큰 규모의 미술관이 도심에 있을 뿐만 아니라 길거리를 걷다가 바로 들어갈 수 있게 접근성이 좋은 경우가 별로 없거든요.”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초청돼 전시를 여러 차례 해본 설치미술가 서도호(사진)의 말이다. 11일 기자간담회 때 그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중심부에 위치한 서울박스 앞에 서 있었다. 서울박스는 반지하-반지상 17m 높이의 큐브형 공간. 이 거대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서 작가의 설치작품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이다. 푸른 반투명 천으로 정교하게 재현된 고풍스러운 서구식 주택 내부에 역시 푸른 반투명 천으로 된 한옥이 둥실 떠 있다. 그 환영 같은 한옥의 용마루 위로, 서울박스 창문을 통해 은은히 보이는 종친부의 용마루가 멋들어진 음악적 반복을 이룬다. 서 작가의 반투명 천 ‘집’ 시리즈 중 가장 큰 작품으로, 서울관의 개관전 5개 중 하나인 ‘현장제작 설치 프로젝트’로 제작됐다.

읽다가 숨이 찰 정도로 작품 제목에 집이라는 말을 5개나 겹쳐 쓴 이유는 무엇일까. “작품을 구성하는 두 집-어린 시절을 보낸 성북동 한옥과 그것을 품은 유학 시절 미국 아파트-뿐만 아니라 작품이 설치된 미술관, 미술관이 있는 종친부 터와 경복궁이라는 역사적 공간, 그 공간이 있는 서울 등 5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서울관을 둘러싼 겹겹의 지리적역사적문화적 맥락의 상징이기도 하다.

서 작가는 서울관에 대해 “시원스럽게 큰 전시공간이 많이 있는 것도 좋다. 기존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도 여기에 전시된 것을 보니 다르게 보일 정도”라며 “비로소 한국 현대미술을 잘 알릴 수 있는 좋은 플랫폼이 만들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기존의 소장품이 새로운 공간과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분위기를 만드는 모습은 또 다른 개관전 ‘자이트 가이스트-시대정신’에서 엿볼 수 있다. 39명 작가의 작품 59점을 통해 동시대 한국미술, 나아가 동시대 한국 사회의 단면을 살펴보는 전시다. 서울박스 남쪽에 있는 지상 1층 제1전시실과 지하 1층 제2전시실에서 진행 중이다. 특히 김홍석 작가의 작품이 공간을 재미있게 활용했다. 이불을 머리부터 뒤집어쓴 은둔형 외톨이 같은 인물들의 극사실적 조각이 1, 2전시실을 관통하는 높다란 공간 한구석에 설치된 것이다. 무기력하게 구석에 쭈그러져 있는 이들의 모습은 거대한 공간의 여백과 천장 창문으로 들어오는 환한 햇빛과 대조를 이루며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씁쓸한 여운을 길게 남긴다.

서울관의 커다란 전시공간들은 이렇게 역설적으로 이용되는가 하면 숭고한 느낌을 자아내는 거대한 작품들에 활용되기도 한다. 서울박스와 연결된 복도의 높다란 벽과 넓은 바닥은 양민하의 미디어아트 ‘엇갈린 결, 개입’이 흘리는 빛의 물결로 끊임없이 출렁거리고 있다. 개관전 ‘연결-전개’ 전의 출품작 중 하나다.

북쪽으로 몇 걸음 더 옮기면 최우람의 5m 길이 키네틱 아트 ‘오페르투스 루눌라 움브라’(라틴어로 ‘달의 숨겨진 그림자’라는 뜻)와 마주친다. 초승달 같기도, 바이킹의 배 같기도, 애벌레 같기도 한 거대한 것이 생명체가 숨 쉬는 것처럼 고요히 꿈틀거린다. 이 작품 역시 ‘현장제작 설치 프로젝트’의 하나다.

4 건축가와 엔지니어, 디자이너의 협업으로 설치된 필립 비슬리의 ‘착생식물원’.
5 최우람 작가의 ‘오페르투스 루눌라 움브라’. 살아 숨쉬는 듯 서서히 움직인다.

7개 건물이 섬처럼 …정해진 동선 없어 편안
그런데 커다란 전시공간을 여럿 갖춘 서울관이 밖에서 볼 때는 별로 거대해 보이지 않는다. 6개의 중정을 사이에 둔 7개의 건물로 나뉘어 있고 높이도 나지막하기 때문이다. 이들 건물의 주요 외장은 한옥 암키와 형태의 옅은 갈색 테라코타 타일. 햇빛에 따라 금빛을 띠거나 짙은 크림색을 띠는 이 타일은 요란하지 않으면서 기품이 있다. 그 밖의 부분은 유리와 연회색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이들은 20세기 초부터 이 터에 자리 잡고 있는 붉은 벽돌의 기무사 건물과 불협화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또 조선시대 이곳에 있었다가 격랑의 근대사 속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진 뒤 다시 돌아온 옛 종친부 건물과도 비교적 잘 조화를 이룬다. 지난 7월 몇몇 기자들과 함께 서울관을 미리 불러본 최정화 작가는 이렇게 평했다. “수많은 제약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낳았군요.”

사실 서울관 건축은 “미션 임파서블-불가능한 과제”라는 말까지 나왔었다. 종친부와 20세기 굴곡의 역사를 담고 있는 기무사 건물을 보존하면서 품어야 하고, 부지 서쪽에 있는 경복궁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또 서쪽의 경복궁과 동쪽의 북촌 문화거리, 북쪽의 삼청동 문화거리를 가로막지 않고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해야 했다.

건축가 민현준이 내린 결론은 군도형 미술관이자 열린 미술관. 7개의 건물들은 섬처럼 독립적으로 서 있고 그들 사이의 마당은 미술관 바깥 길과 그대로 흐르듯 연결된다. 그러니 사람들은 어느 쪽에서건 미술관으로 쉽게 들어와 가로질러 다른 쪽으로 나가거나 원하는 전시공간 혹은 편의시설이 있는 곳으로 직행할 수 있다. 서울관은 서울박스를 포함해 8개의 전시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미술관의 다양해진 역할에 맞게 극장·도서관·강의실 등이 있는데 이들은 주로 북쪽에 있다. 아트숍은 옛 기무사 건물에, 카페는 여기저기에 있다. 건축가 민현준은 서울관의 콘셉트를 이렇게 설명했다.

“8개의 전시장이 지하공간과 지상의 중정들로 연결돼 있지만, 정해진 동선이 없는 게 특징입니다. 여러 섬 중에서 어느 섬에 먼저 가든, 어떤 섬만 골라 가든 여행자 마음대로인 것처럼 이 군도형 미술관에서 관람객도 원하는 전시장만 골라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전의 미술관 건축과 다른 점이죠. 예를 들어 구겐하임 뉴욕의 유명한 로툰다에서는 관람객이 모두 같은 동선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서울관에서는 관람객이 오로지 카페에서 커피만 한잔 하거나, 아트숍만 들르거나, 아니면 영화 한 편만 보고 나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부담이 없기 때문에 미술관에 훨씬 자주 오게 됩니다.”

서울관이 완공되는 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2010년 종친부의 기단이 발굴되면서 서울관 건립 계획 자체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지난해에는 큰 불이 났다. 종친부 담장 복원을 둘러싼 논란은 최근까지 계속돼 왔다. 문화재 보호 단체가 담장의 복원을 강력하게 요구한 반면 미술계와 인근 주민들은 ‘열린 미술관’의 취지에 어긋난다고 강력하게 반대한 것이다. 결국 문화재청은 종친부 뒤쪽인 서울관 동쪽에 2m가 넘는 전통담장을 복원하고 중간 중간 입구를 두기로 8월 결정했다.

6 키시오 스가의 ‘이존자’. 7 킴 존스의 ‘양동이와 부츠가 있는 머드맨 구조물’. 8, 9 자이트가이스트-시대정신’전이 열리는 제 1, 2전시실
10 제 1전시실로 들어가는 입구.

한국세계미술, 협업과 접점의 공간
이제 남은 관건은 이 공간을 채울 콘텐트다. 개관 기자간담회에서 정형민 관장은 “소장품의 90%가 한국 작가 작품인데, 향후 전시 비중에 있어 소장품 전시는 30% 정도로 하고, 70%는 세계 미술을 소개하면서 동시에 세계미술과 한국미술의 접점과 협업을 찾는 전시를 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5개의 개관전 중 ‘연결-전개’는 가장 야심차고 국제적인 전시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리처드 플러드, 영국의 앤 갤러거, 한국의 최은주와 이숙경, 인도의 푸자 수드 등 영향력 있는 7인의 큐레이터가 각각 7명의 작가를 선정했다. 인도 작가 아마르 칸와르의 ‘최상의 숲’처럼 개념에 치중한 작품부터 영국 작가 타시타 딘의 미디어아트 ‘필름’이나 양민하의 작품처럼 강력한 시각적 충격을 지닌 것까지 다양하다.

이중 대만 작가 리밍웨이의 ‘움직이는 정원’은 관람객의 참여를 가장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작품이다. 꽃으로 가득한 정원이 ‘움직이는’ 이유는 관람객이 꽃을 가져갈 수 있기 때문. 단 그 꽃은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때 일어난 일을 SNS에 남기는 것이다. 꽃을 가져간 관람객은 낯선 이와의 조우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할 것이다. 낯선 사람에게 꽃을 줄 용기가 없어 가져가지 못하는 사람도 타인과의 소통을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다.

또 다른 개관전 ‘알레프 프로젝트’는 미술과 과학이 융합된 전시다. 이 중 캐나다에서 활동하는 건축가 필립 비슬리의 인터랙티브 아트 ‘착생 식물원’은 생명체의 신경계 같기도 하고 SF 속 외계 행성의 숲 같기도 한 몽환적인 분위기의 작품이다. 미술가·건축가·공학자의 협업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미술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하여 현대 미술은 사색의 예술이다. 그 사색을 위한 공간이 우리 곁에 새로 생겼다. 마땅히 즐기고 누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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