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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제26화 경무대 사계(2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제1차 방일>
대통령이 되기 전 이 박사의 생활비는 태창방직의 백낙승 사장이 주로 댔다는 사실은 이미 얘기했다. 정부수립 전에는 매월50만원씩을 보내왔다. 그때 돈 심부름 주로 내가 맡아했었다.
매달 보내온 것이기 때문에 백씨는 이 박사가 경무대로 옮긴 후에도 나에게 대통령의 생활비를 가져왔다. 그때까지 대통령이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얘기를 안 했기 때문에 받을 수도 안 받을 수도 없어 며칠 기다려보라고 해놓고 대통령께 말씀드렸다.
『백 사장이 각하의 생활비를 가져 왔는데 어쩌면 좋겠습니까.』
『백 사장이…. 내가 깜박 잊고 얘기를 못했군. 이제는 생활비를 받을 수 없다고 얘기해. 그 사람 참 꾸준하고 고마운 사람야. 한번 들어오라고 해.』 백 사장 내외는 며칠 후 대통령이 좋아하는 약밥을 해 가지고 들어와 경무대에서 오찬대접을 받았다. 식사가 끝난 후 이 박사는 그를 응접실로 데려갔다.
『백 사장, 그동안 도와주어 고마와. 내가 돈이 있으면 갚아야겠으나 나에게 먹고살라고 준 것이 아니고 국가 일하라고 준 것이니 고맙게 받았어. 백 사장도 국리민복을 위해 일하면 도와주겠어.』
백씨는 이 말을 듣고 눈물을 글썽이며 감격해 했다. 후에 「달러」라면 그렇게도 벌벌 떨던 이 대통령이 일본기계를 들여와 태창방직을 확장하도록 허가해 준 것은 이 인연 때문이었다.
경무대 앞 지뢰매설 사건이 일어난 때는 이 대통령이 「맥아더」 사령관으로부터 동경의 연합군 최고사령부를 방문해 달라는 초청을 받은 후였다.
이런 사건도 있고 해서 대통령의 도일은 떠나기 직전까지 비밀에 붙여졌다.
이 대통령은 10월19일과 20일 이틀간 일본을 방문했다.
떠나기 전 김양천 비서실장에게 일본에 가니 공항으로 나오라면서 비밀에 붙이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김씨는 설마 어떠냐 싶어 부인을 데리고 비행장에 전송을 나갔다.
김씨 부인의 인사를 받은 대통령은 비밀로 하자고 했는데 아무리 내외간이지만 알렸다해서 상당히 노여워했다.
김씨가 다음해 경제인 사절단과 미국에 갔다가 경무대로 복직하지 못하자 이 일 때문이라는 소문이 날 정도였으니까-.
「맥아더」가 이 대통령을 초청한 속셈은 이 박사의 대일 강경 노선을 다소나마 누그러뜨리자는 데 있었다. 반면 이 박사는 주한미군을 철수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받고 재일 교포의 실태를 알아보는데 치중했다.
이 대통령을 맞은 「맥아더」는 자신의 대일 융화 정책을 설명하면서 앞으로 일본이 「아시아」 반공보루의 큰 역할을 담당해야하는 만큼 한국의 일본에 대한 강경일변도 정책은 「아시아」 평화를 위해 걱정된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이 박사는 『일본이 그런 자격을 갖추자면 우리에게 스스로 우방임을 실증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토인 대마도와 36년간 착취해간 우리의 재산을 반환해야합니다』고 강경한 요구조건을 내세웠다.
첫 회담은 이렇게 쌍방의 주장이 엇갈려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이 대통령은 1차 회담이 끝난 후 재일 거류민단에서 주최한 오찬회에 참석하여 교포 유지들로부터 그곳 실정을 들었다.
그들의 얘기는 종전직후엔 교포들이 준 연합국 국민대우를 받아 세도도 좋았고 돈을 번 사람도 있으나 허세와 방종 때문에 이제는 추방론까지 대두될 정도이며 교포의 중앙기관으로 만든 조선인 총 연맹은 공산당의 침투로 공산당 손에 넘어갔으니 대한민국의 보호가 시급하다는 푸념이었다.
이 얘기를 들은 이 대통령은 「맥아더」와의 2차 회담에서 대표부 설치·조총련 해체와 재산의 한국정부 이관 등을 요구했다.
「맥아더」는 주일 대표부 설치는 고려할만하나 다른 요구는 미국무성의 정책상 답변하기 곤란하다고 말했다.
이 교섭에 의해 1949년1월14일 일본 동경의 한복판 은좌에 있는 「핫도리·빌딩」(복부)에 주일 대표부가 개설된다.
방일 당시의 이 대통령 요구는 누가 봐도 좀 엄청난 것이었다.
후에 이 박사는 『내가 그런 요구를 한 것은 관철되리라고 생각해서 한 것은 아니야. 앞으로 있을 대일 배상문제의 심리적 뒷받침을 하고 우리 대한민국의 대일 정책을 국내외에 다짐해 두자는 것이야』라고 설명했다.
이틀간의 SCAP(연합군 최고사령부)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이 박사에게는 좋지 않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10월20일 제주도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려던 여수 주둔 14연대(연대장 박승훈 중령)에서 일부 병력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때만 해도 정부가 수립 된지 2개월밖에 안돼 행정체계가 확고하지 못하고 군에는 좌익 불순분자들이 상당히 있었다.
공항에 마중 나온 철기와 동산은 광주와 남원 주둔군과 경찰이 출동했으니 곧 진압될 것이라고 보고했으나 반란군은 순천까지 점령하여 갖은 만행을 자행했다. <계속> [제자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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