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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있으면 죽음뿐" … 탈출 인파 몰려 공항 아수라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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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11일 세부섬 타보곤 도로에서 아이들이 ‘도와 주세요’ 등이 적힌 팻말을 들고 구호를 요청하고 있다. [타클로반 AP=뉴시스, 세부 로이터=뉴스1]

“국제사회 도움이 필요하다. 내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태풍 하이옌(海燕)이 할퀴고 간 필리핀 레이테섬 타클로반에선 12일에도 생존자들의 사투가 계속됐다. 사람들은 물과 식량을 찾아 헤맸지만 참사 닷새째 날까지 교통·통신 단절로 구호작업이 순조롭지 못했다. 타클로반에서 중앙일보·JTBC에 소식을 전하고 있는 CNN 서울 특파원 폴라 행콕스와 홍콩 특파원 앤드루 스티븐스에 따르면 현장은 사실상 무법천지로 변했다.

사람들은 생필품을 구하러 상점을 약탈하고 구호품을 실은 적십자사 소속 차량까지 습격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가게 주인은 “식량만이 아니라 냉장고·세탁기 같은 가전제품까지 쓸어갔다”며 “타클로반 인구 99%가 가톨릭 신자인데 믿기지 않는 일”이라고 탄식했다. 페이스북 등 인터넷에는 상점을 지키기 위해 총기로 무장한 점주들의 사진이 올라왔다.

 치안 부재를 틈타 600여 명이 수감된 타클로반 교도소에서 일부 죄수가 탈옥하는 일도 벌어졌다. AP통신은 12일 지역 군 관계자를 인용해 달아나는 죄수들에게 경비대가 총격을 가했다고 전했다.

12일 필리핀 타클로반 공항에 이재민 수송용 C-130 군용기가 도착하자 3000여 명이 탑승하려고 몰려들어 아수라장이 됐다. [타클로반 AP=뉴시스, 세부 로이터=뉴스1]

 필사의 탈출 행렬도 이어졌다. 12일 타클로반 공항에 필리핀 군용기 2대가 착륙하자 3000여 명이 삽시간에 몰려 아수라장이 됐다. 빗속에서 아기 엄마들은 "이대로 있으면 다 죽게 생겼다”며 자식들만이라도 비행기에 태워 달라고 호소했다. 전날 국가재난사태를 선포했던 필리핀 당국은 군과 경찰력을 증강 배치했다. 마닐라 스탠더드 투데이에 따르면 11일 경찰 특별기동대 883명이 타클로반·오르모크 등지에서 치안 확보에 나섰다.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은 깨끗한 물”이라고 CNN 특파원들은 입을 모았다. 강가에 방치된 시신들이 식수를 오염시키면서 420여만 이재민을 더욱 절망케 하고 있다. CNN이 만난 ‘국경 없는 의사회’ 관계자는 “수질 오염으로 인한 전염병이 생존자들을 다시 사지로 내몰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필리핀 국가재난감소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이날까지 확인된 사망자가 1744명, 부상자가 2487명이다. 사마르섬에서도 400명이 사망하고 2000명이 실종된 것으로 집계됐다. 동사마르와 세부에서도 각각 162구, 63구의 시신이 확인됐다.

 전문가들은 피해가 이렇게 커진 데는 필리핀 방재 시스템에 문제점이 있다고 본다. 타클로반만 해도 최근 40년간 인구가 3배(22만여 명)로 늘어나면서 태풍에 취약한 해안가에 집단 거주지가 밀집하게 됐다. 가옥 3채 중 1채가 목재 외벽을 둘렀을 정도로 시공도 부실했다. 게다가 태풍 상륙 전 당국이 수차례 대피령을 내렸음에도 주민들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집을 비웠다가 도둑이 들까 두려워한 것이다. 미국 마이애미대에서 허리케인을 연구하는 브라이언 맥놀디 교수는 “이번 재앙은 75∼80%가 자연보다는 인간의 책임, 즉 인재(人災)”라고 말했다.

행콕스 특파원(左), 스티븐스 특파원(右)

 국제사회는 구호 지원을 서두르고 있다. 미 국방부는 12일 필리핀에 핵추진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함을 파견한다고 밝혔다. 약 5000명의 병력과 구축함·순양함·잠수함·함재기 80대로 구성된 조지워싱턴함은 주둔 중인 홍콩을 떠나 이르면 14일 필리핀 현지에 도착한다. 미 국제개발처(USAID)도 구호·복구작업에 2000만 달러(약 214억원)를 긴급 지원하기로 했다. 영국 정부는 인근 싱가포르에 정박 중인 함정 1척을 피해지역에 급파하는 한편 복구장비 공수 등을 위해 C-17 화물기 파견도 추진하고 있다. 유엔은 응급 의료품과 식수, 위생설비 지원 등에 250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 세계식량계획(WFP)도 200만 달러의 재해대응기금을 집행키로 했다.

강혜란·전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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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N 서울·홍콩 특파원 필리핀 2신
교통 단절로 생필품 전달 안 돼
상점·구호차량 약탈 '무법천지'
인구집중·부실주택이 재앙 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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