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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맥아더 원수 해임(2)|웨이크 토 회담(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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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맥아더 원수의 대만방문이 가져온 파문이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이와 비슷한 사건이 같은 8월에 일어났다. 고익 보수 색채가 짙은 미 해외참전재향군인회(Veterans of Foreign Wars)에서는 맥아더 원수에게 금년 전국 연차대회 때에 기념사를 보내주도록 요청했다. 원수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태평양에서의 대만의 전략적 가치에 관한 견해를 이 장문의 기념사에 담았다. 그런데 미리 이 기념사 내용을 알게된 트루먼 대통령은 즉시 철회를 요구해서 대회에서는 낭독되지 못했다. 그러나 맥아더의 서명 내용은 전국의 매스컴을 통해 널리 보도되고 말았다. 원수의 성명은 전략에서부터 정치면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문제를 다룬 것으로 그 어조도 특유의 웅변조로 격렬한 것이었다.
『태평양 지역에 있어 우리의 전략적 잠재력에 대한 대만의 가치를 둘러싸고 많이 오해들을 하고 있다. 대만은 보다시피 「얼루션」열도로부터 「마리아나」제도로 이르는 여러 섬의 중추지역에 해당된다. 이 방위선이 건재해야만 미국은 공군력으로써 태평양 지역에 있어서의 모든 적대 행동을 저지할 수 있다. 대만은 이처럼 중대한 전략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만약 그 곳이 적수 중에 들어간다면 이 방위선의 중앙 및 남부에 중대한 위험을 가져올 것이다. 일부에서는 미국이 국부를 지원하면 「아시아」제 국민의 공감을 상실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처럼 케케묵고 어리석은 생각도 없을 것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동양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동양 사람들의 심리는 공격적이고 결연한 동적인 리더쉽을 존경하고 이에 복종하는 경향이 있다.

<맥 원수, 「워싱턴」초청 사절>
미국은 대만 개입을 최대한으로 약속해야 할 것이다.』
맥아더는 나중에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견해였다고 해명했지만 워싱턴이 받은 충격은 컸다. 트루먼 대통령이나 「애치슨」장관은 이 「VFW」문제가 일어나기 전에도 맥아더의 대만 방문이 중공을 자극해서 분쟁을 확대시키지 않을까 몹시 염려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미 해외참전재향군인회 성명사건이 재발했으므로 트루먼 대통령은 이때부터 이미 맥아더의 해임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됐다고 일부에서는 보고 있다.
그러나 그후 인천 상륙의 성공과 38선 돌파 등의 맥아더 작전의 성공으로 둘의 대립은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었다.
그런데 트루먼으로서는 「유엔」군의 북진과 함께 마음 한 구석에 꺼림칙한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소련이나 중공이 참전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였다.
특히 중공은 유엔군의 38선 돌파 후 가만히 안 있겠다는 경고를 여러 번 되풀이했다. 한국전의 국지화는 트루먼이 시종 일관하게 추구해온 것으로 중공의 이런 경고를 간단히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차제에 맥아더와 직접 만나서 이 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를 알아보려고 결심했다.
1950년 10월15일의 웨이크 회담은 이런 배경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처음이자 마지막 대면이었던 이 회담이 표면상으로는 우호적인 것 같았지만 사실은 둘의 불화를 더 조장했을 뿐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그의 자서전(Memoirs, by Harry S. Truman)이 회담의 내막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맥아더와 만나고 싶은 가장 단순한 이유는 그와 나와의 접촉이 전혀 없었다는 것과 그는 직속 상관인 대통령을 알아야 하며 나도 극동의 현지 사령관을 친히 사귀어 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맥아더가 미 일본 점령 사령관으로 있는 동안 잠시라도 좋으니 워싱턴에 다녀가라고 초청했지만 현지를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이 초청을 사절한 것을 몹시 섭섭하게 여겨왔다. 마땅히 와서 본국 정세를 직접 익혀야 했었다.< p>

<단추 안 채우고 낡은 군모>
나는 해외근무 외교관들에게 4년마다 1년씩은 본국근무를 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이래의 원수언동을 보건대 사고나 주장이 아시아식으로 굳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해리먼 특사와 그 밖의 입사를 통하여 원수에게 세계정세를 우리가 워싱턴에서 보는 것처럼 관찰하도록 설득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그래서 원수가 나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으면 생각을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가 맥아더를 만나고자 한 또 하나의 이유는 한국전에 중공이 개입하려고 한다는 보도가 빈번한데 현지 사령관으로부터 이 문제에 관한 정보와 판단을 듣고자 함이었다. 나는 한 때 한국을 잠시 방문하고 거기 있는 유엔군을 위문 격려하려고 생각했다.
또한 맥아더에게 워싱턴으로 오라고 명령할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북진이 궤도에 오른 이 중요한 시기에 맥아더는 휘하 부대와 가까운 곳에 있고 싶어하며 불과 몇 시간의 회담을 위해서 워싱턴에 오는 것을 꺼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태평양의 웨이크 도를 회담 장소로 결정한 것이다.
10월15일 새벽에 일행은 웨이크 도에 도착하였다. 먼저 도착하여 마중 나온 맥아더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즉시 항공사 지배인 사무실로 달렸다. 맥아더는 군복상의의 옷 단추는 채우지 않은채 낡은 군 모를 쓰고 있었다. 우리는 먼저 단둘이서만 1시간 이상 한국과 일본정세를 놓고 회담했다.
원수는 한국에서 유엔군은 이겼다고 확신하고, 중공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대일 강화 조약 체결도 순조롭게 준비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문제의 미 해외참전재향군인 기념사사건을 끄집어내고는 물의를 일으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문제는 이제 끝난 것으로 개의치 않는다고 대답했다. 원수는 정치가들이 1948년에 자기를 정계에 끌어넣으려고 했지만 앞으로 정치를 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다짐했다. 둘의 단독회담이 끝나고 조금 쉬었다가 다시 7시30분부터 제2차 회담을 개최하였다.
이 회담에는 나와 맥아더의 수행원들도 모두 동석했다. 이 회담에서 맥아더는 한국에서의 적 저항은 11윌23일의 추수 감사절까지는 끝날 것이며, 이어 2개 사단만 명년1월에 실시될 것으로 보이는 한국총선까지 남겨두고 크리스머스까지는 나머지 미8군은 모두 일본으로 데려올 작정이라고 말하였다. 유엔군이 관리하고 있는 포로문제 이야기도 나왔는데 원수는 잘 먹이고 잘 입혀 좋은 대우를 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음에 「맥아더」는 나와의 단독회담에서 언급되었던 중공이나 소련의 참전 가능성에 대해 일동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로서는 그런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중공은 만주에 30만 병력이 있고 그중 압록강 연안에 아마 10만 명 내지 12만 명 정도를 배치하고 있다. 한국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기껏해야 5∼6만 명에 불과할 것이다.

<훈장만 주고 총총히 헤어져>
그들은 공군력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압도적인 공군을 가지고 있는 이상, 만약 중공군이 평양까지 남하하려고 한다면 최대의 살육전이 멀어질 것이다. 소련개입 가능성에 관해 말한다면 그들이 공군은 있지만 기 성능이나 조종사 기술이 우리가 월등 우수하다 그리고 겨울 전에 소련이 상당한 병력의 지상군을 한국에 투입하리라고는 보지 않는다. 중공지상군을 소련공군이 지원하면서 합동으로 개입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실현성은 희박하다.』
이렇게 해서 나와 맥아더와의 두 차례 회담은 상오 9시께에 끝났다. 점심이라도 함께 들고 싶었지만 맥아더가 빨리 동경으로 돌아가고 싶어하기에 그와 「존·무초」대사에게 공로훈장을 달아주고는 웨이크 오를 떠났다. 나는 「맥아더」와의 회담에 만족하고 워싱턴에 돌아오는 길에 샌프란시스코에서 귀국보고 연설을 해라.>
한편 맥아더 원수는 어떤 심경으로 이 회담에 임했으며 회담 성과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맥아더 회고록(The Reminiscences of Douglas Mac Arthur)에는 「트루먼」자서전과는 상당히 장치되게 기록돼 있다.

<10월12일에 나는 워싱턴으로부터 2통의 메시지를 받았다. 「애버럴·해리먼」과 「조지·마셜」국방으로부터 온 것으로 해리먼의 전보에는 『가까운 시일 안에 만나 뵙고 귀하의 눈부신 승전을 축하하고 싶습니다…』라고 씌여 있었다.
마셜 국방 전보는 대통령이 나와의 직접 회담을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전해 온 것으로 대통령은 15일에 하와이에서 만날 것을 바라고 있지만 한국정세 때문에 내가 긴 여행을 할 수 없다면, 대통령은 웨이크 도까지도 갈 용의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15일에 웨이크 도에서 대통령을 즐거이 만나 뵙겠다고 회답했다.

<동경기자단 동행 거절당해>
이 회담에 「해리먼」특사도 동행한다는 것 이외에는 회담 목적이나 의제같은 것에 대해서는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동경의 여러 미국기자들이 이 회담을 취재하려고 나와 동행할 것을 청해왔다. 워싱턴에서는 많은 기자들이 웨이크 도로 온다고 발표되고 있었고 거기에다 내 비행기에는 여러 기자들을 태울 여유가 있었으므로 함께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허가 해주기를 바란다는 내 의견을 첨부하여. 동경기자단 요청을 국방성에 들렸던 바 놀랍게도 「노」라는 것이었다.
트루먼 대통령 일행은 35명의 기자와 카메라맨을 데리고 세대의 비행기에 분승, 웨이크 도에 도착했다.
◆주요일지(1951년3월21·22·23일)
※3월21일 ▲미군, 춘천돌입 ▲중공, 천진서 간첩 혐의로 지명의 외국인검거 ▲애치슨 국무, 유엔 군사령관, 38선 재 돌파에 새 권한 불요라 언명
※3월22일 ▲미8군, 일제공세 개시 ▲부산서 국경까지 총진격 국민궐기 대회 ▲「이란」국경에 소군 집결
※3월23일 ▲3천명의 미 공정대, 문산에 낙하 ▲28개 군에 계엄령해제 ▲일본사법부, 공산단체 소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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