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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삼성 수능과 현대차 고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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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철호
논설위원

취업준비생들이 삼성 입사시험인 SSAT를 ‘삼성 수능’, 현대차의 HMAT는 ‘현대차 고시’라 부르는 모양이다. 삼성은 학벌·학점·스펙을 보지 않고 매년 18만여 명에게 기회를 주되 이 중 9000여 명을 뽑는다. 현대차는 미리 서류전형을 통해 10배수로 압축한다. 이 관문을 뚫어도 또 험난한 에세이와 면접이 기다린다. 당연히 구직자들의 불만은 대단하다. “기출문제집을 사고 학원까지 가야 한다”거나 “올해는 왜 이렇게 문제가 어렵냐”며 툴툴거린다. 삼성은 미리 “채용방식을 일부 손질하겠다”며 꼬리를 내렸다.

 대기업 공채는 우리의 독특한 제도다. 삼성 간부들도 SSAT 문제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그 전해에 SSAT 점수가 높았던 신입사원들을 연수원에 모아놓고 출제를 맡기기 때문이다. 같이 가장 오래 일할 사람에게 후배를 뽑도록 위임한 것이다. 삼성의 채용기준은 사회 분위기에 따라 다르다. 올해는 합격자의 35%를 지방대 출신, 5%는 저소득층 자녀들로 채운다. 입사 시험은 그룹 회장의 의지도 예민하게 반영한다. 정몽구 회장이 ‘뚜렷한 역사관’을 주문하자 현대차는 “가장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을 쓰라”는 문항을 포함시켰다. 두 회사 모두 장기근속한 임직원 자녀에게 일부 가산점을 주는 것도 지극히 한국적인 풍경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지금의 공채제도가 유지됐으면 하는 쪽이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기회 평등’과 ‘인생 역전’의 DNA에 걸맞기 때문이다. 물론 취업준비생들의 푸념은 이해한다. 하지만 미국 대기업들과 비교해 보자. 그쪽 채용제도는 회사 효율만 따진다. 미 유학생 사이트인 워킹유에스닷컴(workingUS.com)만 보면 요즘 그쪽 채용시장은 장난이 아니다. 명문인 프린스턴대 졸업생마저 미취업자가 절반에 가깝다. 컴퓨터·인터넷 분야는 괜찮지만 문과 분야는 최악의 취업 빙하기다. 오죽하면 로스쿨 지원자마저 절반이나 줄었겠는가.

 미 기업들의 채용기준은 간단하다. ‘해고하기 가장 좋은 시기는 채용하기 전’이 원칙이다. 구글·애플은 서류전형을 통해 구직자의 2~5%에게만 전화면접 기회를 준다. 여기를 5분의 1의 확률로 통과해도 2~6차례의 온 사이트 인터뷰(대면 면접)를 거쳐야 한다. 이 자리엔 함께 일할 상사와 동료들이 나와 서너 시간씩 밑바닥까지 쥐어짠다. 미 기업들은 인맥이나 스펙을 안 본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더하다. 그 회사에 먼저 입사한 선배나 동료가 추천하면 모든 과정을 건너뛰고 최종 인터뷰를 하기 일쑤다. 아예 채용공고조차 없이 뽑는 자리(Hidden position)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미 대학생들이 일찍부터 인맥을 넓히고 인턴십에 목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 대기업의 인터뷰는 냉혹하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면접관들은 마음에 안 들면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로 유명하다. 서로 돈과 시간을 아끼자는 것이다. 또 미 기업들은 갓 대학을 졸업한 신입사원보다 경력사원에 눈독을 들인다. 위험이 적고 남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GE는 아예 채용인원의 90%를 다른 회사에서 5년 이상 일한 경력자로 채우는 게 원칙이다. 우리나라라면 난리법석이 날 일이다. “면접관이 비인간적이다” “대기업이 고급인력을 훔쳐간다”며 뭇매를 맞았을 게 분명하다.

 물론 언제까지 삼성·현대차의 아름다운(?) 공채제도가 이어질지 의문이다. 생존을 위한 진화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토니 와그너 하버드대 교수는 “기업들은 당신의 지식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당신이 아는 것으로 뭘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했다. 우리 취업준비생들도 이런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면 언제 중국·인도의 경쟁자들에게 삼성·현대차의 일자리를 빼앗길지 모른다. 뉴욕타임스의 토머스 프리드먼은 “일자리를 찾는(search a job)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일자리를 창조해야(invent a job) 한다”고 갈파했다. 우리 취업준비생들도 마음을 고쳐먹어야 할 때다. 삼성 수능·현대차 고시의 긴 행렬도 하루빨리 사라졌으면 한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