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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제 19화><형정 반세기>(15)권영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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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사형장>
사형장-그곳은 바깥세계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한번 걸어가면 결코 살아 돌아 올 수 없는 곳이다. 사형장에로의 길은 언제나 일방통행이었다.
솔직이 나는 40년 가까이 형무소에 관계해 왔었지만 사형장에 관한 이야기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직책상 어쩔 수 없이, 달갑지 않은 마음으로 사형 집행 장에 입회하곤 했었으나 그곳에 얽힌 기억 하나 하나가 지금도 너무 생생한데다가 또 아무리 죄 값이라고 하지만 인간이 다른 인간을 죽여야 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처분이 아니라는 개인적인 주장 때문이었다.
사형제도 그 자체와 방법 등에 대한 시비는 오래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있어왔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지금의 교수령은 일본의 총독부 통치가 이 땅에 펼쳐진 이후부터 있었다. 그전까지는 사형의 집행은 모두 참형으로, 행형도 자라는 무딘 칼로 죄인의 목을 여러 차례 쳐서 죽이곤 했었고 특히 역적 등 국사범은 오살형 또는 능지처참형이라는 설명하기조차 끔찍스런 방법으로 처형했었다.
기록을 보면 기형의 장소로는 한강변 「새남터」(지금 서부 이촌동 건널목 옆)와 무교동(청계천 다리 위), 당 고개(용산 철도 관사자리) 서소문 밖(의주로 네거리부근) 등 네 곳이었다는데 중 죄수는 주로「새남터」에서 집행했다 한다.
어렸을 때만해도 참형 집행 광경은 일반에게 자주 공개되었었고 심지어 군중들을 불러모으기도 했었는데 이는 아마도 합리적인 의미보다는 일반에게 분노와 위협을 과시해 적성을 배제하려던 의도에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끔찍스런 공개집행에서 은밀한 교수형으로 그 방법이 바뀌었어도 사형이 사람을 죽이는 것임에는 매한가지였다.
내가 처음 구경했던 서대문형무소의 형장은 바깥세상과 가장 가까운 구내 서북쪽 끝 담에 맞붙어 있었다. 20평 남짓한 목조단층의 독립가옥은 높은 담에 가려 지붕만 보이겠지만 지금의 금화「아파트」바로 밑에 있었다.
한번쯤 옥살이를 한 사람이나 재감 자들은 그곳을「넥타이」공장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아마도 밧줄에 목을 매어 죽인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라 생각된다.
보통 사형이 확정되어도 그에 대한 일과는 평소와 다름없다. 집행시간이 정해져도 그는 일반죄수와 마찬가지로 주기적으로 감방을 옮기고 또 사형장부근을 거치는 길을 따라 목사 실을 찾아 설교를 듣곤한다.
그러나 평소와 똑 같더라도 집행당일 교도관이 불러내면 대부분의 사형수들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금방 눈치챈다. 장기수 특유의 예감도 있지만 보통 때와는 달리 군데군데 경비교도관이 서있고 일반 죄수들의 왕래가 드물기 때문이다. 이 순간 열명이면 7, 8명은 소리라도 지를 듯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아 몸부림친다. 비교적 침착한 죄수도 형 장문 앞에 이르러는 마지막으로 하늘을 보고, 또 땅을 보고는 비틀한다. 자제를 잃은 몸이 교도관들에 의해 떠 받혀 집행 장에 들어서면 교도소장이 확정된 판결문을 읽은 뒤 마지막 유언을 듣는다. 판결문을 거듭 읽어 주는 것은 죽는 본인에게 그 까닭을 확인시키는 것과 집행하는 직원들에게 심리적인 위안을 주기 위해서이다.
이동안 대부분의 사형수는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자신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수갑 찬 손으로 얼굴을 매만지는 모습을 본다.
마지막으로 목사의 설교가 끝나고 검사의 집행명령이 떨어지면 바로 뒤의 집행대로 옮겨지고… 보통 15분 뒤에 의사가 검시를 한다.
내가 겪었던 숱한 사형수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사람은 진보당사건에 관련, 간첩죄 등으로 죽은 조봉암으로 그의 최후는 너무도 조용히, 그리고 침착히 치러졌다.
61세의 조봉암은 집행 날 아침, 미리 짐작이라도 했다는 듯 머리를 말끔히 가다듬고 평소대로 「2310」 번호표가 붙은 모시바지저고리, 흰 고무신 차림으로 수갑을 찬 채 불려나왔다.
1959년 7월31일 상오10시45분 집행 장을 들어선 조봉암은 잠시 주춤하는 듯 했으나 미리 대기하고 있던 안문경 검사와 교도소 간부들에게 묵묵히 인사를 했다.
집행관이 인적사항을 묻고 판결문을 읽는 동안에도 조는 두 눈을 감은 채 아무런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이어 그의 재심청구가 기각된 이유를 설명하고 마지막 말을 권유했다.
『별로 할 말이 없고…결과적으로 죄짓고 가니 미안할 뿐…가족들은 잘 알아서 살터이니…』약간 떨리는 듯 했으나 최후의 말로서는 너무 짧았고 남은 가족들에게 남긴 말 또한 간단했다.
『술 한잔과 담배 한대만 주십시오』-낮은 목소리로 말했으나 규정에 의해 술 한잔과 담배한대는 허락되지 않았다. 이어 조봉암의 요구로 목사가 설교와 기도를 해주었다.
『우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빌라도」에 끌고 가서 고소하여 가로되…』「누가」북음23장이 목사의 떨리는 음성으로 읽어졌다.
조봉암은 여전히 눈감은 채였다.
『집행』-그는 교도관으로부터 두 눈을 가리는 흰 수건을 받고는 교수대로 향했다. 마치 잠시 후 돌아오기라도 할 듯한 걸음걸이로. 그날 상오11시3분, 모든 일들이 끝났다. <끝>

<다음은 김효록씨의 전문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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