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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복권」 노리는 중공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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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현재의 중공정책은 거의 모두가 문혁의 입김에 의해서 정형되어 있다. 이것은 문혁이 단순한 당권싸움이 아니라 공산주의의 본질에 관한 이론투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 중공정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혁이 낳은 두 가지 지침, 신헌법 초안과 새 당헌에서 원칙과 한계점을 찾은 뒤 이것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가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당헌에서도 표시되었지만 신 헌법초안 제1조는 중공이『「프롤레타리아」계급독재의 사회주의국가』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모든 생산수단의 국유화, 욕망에 따른 분배를 의미한다. 그리고 극히 한정된 범 위안에서는 현실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그리고「프롤레타리아」계급독재라는 말이 「타계 급의 존재」를 전제했다는 점에서 홍위병식 대중노선에 의한 영속 혁명론은 헌법에 의해서 보장된 셈이다.
두 번째로 눈에 띄는 것은 동초안 16조의 공산당 기대 권에 관한 규정이다. 즉 구헌법이 「국가의 최고기관」으로 삼았던 인민대표자대회(국회)를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 둔 것이다.
문혁 기간 중 소위 삼결합 세력인 혁명위원회에 의해 풍지박산 되었던 공산당은 헌법에서 먼저 구출된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문 화하지 않았다. 지난8월 그러니까 헌법초안이 나온 지 8개월만에 중국공산당은 지방조직 재건을 완료한 것이다.
세째로 지적해야 할 것은 구전대회에서 재확인된 경제정책문제이다. 사유재산과「리베르만」식 이윤재분배를 완전히 배격한 중공으로서는 농민과 노동자들의 생산의욕을 높여주는 전통적 수단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온 것이 소위 「사회주의 교육운동」과 「양조퇴주로」였다. 사회주의 교육 운동은 개인적 이익으로 생산의욕을 자극하는 대신 사회주의에 대한 사명감을 불어넣음으로써 열심히 일하게 한다는 내용. 이것은 58년 대약진운동 때도 시도되었던 방법이나 문혁 후의 성패여부는 아직껏 알려지지 않았다.
「두발로 걷기 운동」이라고 번역되는「양조퇴주로」는 생산기술에 관한 명제이다. 즉 초현대식 대량생산방법이 효과적이긴 하나 자본의 절대 부족 때문에 불가능하므로 중국전래의 원시적 소규모 생산방법을 병행하자는 것이다.
올해부터 시작된 제4차 5개년 계획은 이것을 대 원칙으로 삼고 있으며 인민일보도『지방소형공업을 육성하자』는 사설로 그 타당성을 역설했다.
이 「두발로 걷기」 정책은 58년 대약진 때의 시행착오를 시정, 어떠한 성과를 거두었는지 불명이다. 예컨대 지난해 중공의 화학비료 생산 중 43%가 소형공장에서 생산되었던 것이다.
정치·경제적인 측면 외에 또 한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법사상의 변화이다. 죄형법정원칙에 의한 법치주의 대신 중국 고래의「덕치주의사상」이 풍미한다는 사실이다.
즉 지금까지의 『법을 어긴 자에게는 형벌을』이라는 명제 대신 『잘못한 자는 대중 앞에서 자기자신에 대한 비판을 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 경향은「코뮨」국가의 실험과 함께 가장 주목할 만한 「정책」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문혁 바람에 가장 호된 변화를 겪은 것은 대외정책부문이었다고 소위 중간 지대론과 민족해방전쟁이론에 입각한 호전적 세계혁명노선은 한때 중공을 완전히 고립시켰기 때문이다.
헌법초안 15조는 중공군의 임무가『제국주의·사회제국주의 및 그 주역들의 침력으로부터 국토를 지키는 것』이라고 규정, 원칙적인 면에서는 한발도 물러 설 수 없음을 밝혔다.
따라서 이와 같은 「원칙」과 현재 수행되고 있는 「전략」 간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하는가가 문제된다. 미·중공접근이라는 현실과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를 지키는 군의 임무」 사이에는 너무나 깊은 계곡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공이 외교정책과 국내정책을 한 울타리 속에 넣지 않겠다는 뜻 69년4월의 구전 대회 때 이미 알려졌다. 문혁의 주역이었던 임표가 그의 정치보고 가운데서 「혁명의 수출」 대신 「혁명의 자력갱생」을, 자본주의국가와의 비타협적 투쟁 대신「평화 5원칙을 기초로 공존할 것」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혁명의 자력갱생」은 동남아의 민족 해방운동 자들에게 찬물을 끼얹은 격이었다. 월맹에 대해서는 그 뒤에도「대 후방」이 될 것을 계속 다짐했으나 문혁 기간 중의 무분별한 적극정책을 파기한 것 같다.
한편 자본주의국가와의「공존용의」를 비쳤던 대외노선 3원칙은 그 내용이 유소기의 총 노선 3원칙과 완전히 일치한다. 말하자면 대외정책에 관한 한「구 실권파」와「현 집권파」 간에 커다란 차이가 없음이 밝혀진 것이다.
이와 같은 분석은 그 뒤의 중공행동에서 완전히 입증되었다. 「유엔」 가입을 위한 안간힘, 전략의 요구에 따른 대미접근, 「아시아」에서의 패권요구 등은 『유소기 시대에 가능했던 일이 모·림·주파에게도 가능』함을 보여준 사례이다.
하지만 어느 나라에서나 외교정책의 방향과 한계점은 국내정책에서 결정된다.
따라서 중공의 실현은 항구적인 계급투쟁·인민공사·대중전정을 기초로 한 덕치주의사상은 현재의 타협적 외교정책이 최저강령적 성격의 것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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