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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인간 본성 지옥이란 삶의 한복판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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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호 24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다시 보게 한 베스트셀러 ‘다빈치코드’의 댄 브라운은 최신작 ‘인페르노’에서 또 다른 르네상스맨 단테의 ‘신곡’으로 우리 시선을 모았다. 그런데 척 보면 아는 ‘최후의 만찬’과 달리 ‘신곡’은 좀 당황스러웠다. 읽어봤다고 착각했지만 사실 제대로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연극 ‘단테의 신곡’, 11월 2~9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신곡’은 서양에서 성경과 맞먹는 존재감을 가진 고전 중의 고전이지만 우리에겐 어렵고 따분한 중세문학으로 치부되어 왔다. 무대에서 만나기는 더욱 어려웠다. 극성을 가진 희곡도 아닌 100곡의 노래로 된 방대한 서사시를 무대화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3만여t의 물을 무대에 쏟아 부었던 2002년 LG아트센터의 독일 탈리아극장 내한공연을 구경해본 정도다.

그런 단테의 진면목을 마침내 우리 손으로 파헤쳤다. 한태숙 연출과 고연옥 작가가 뭉쳐 22개월 동안 재창작한 대작이다. 철학과 종교를 넘나드는 고전이니 지루하지 않을까. 염려는 필요 없다. 관념적 언어의 나열로 골치 아프게 하는 무대가 아니다. 감각을 총동원해 가슴 뛰게 하는 살아 있는 무대다. 한태숙 연출은 지옥이란 다름 아닌 우리 삶의 한복판이라며, 감추고 싶은 인간 본성의 파노라마로 쉴 틈 없이 관객을 몰아세운다.

전형적인 연극의 틀을 넘어 대사와 소리꾼의 창, 성악가의 노래가 섞인다. 국악과 클래식, 일렉트로닉을 넘나드는 음악과 강렬한 미장센을 구현하는 영상과 무대장치가 스펙터클한 표현주의적 총체극을 빚어낸다. 서양 고전에 우리 소리가 녹아들까 의문이었지만 혼란스럽지 않게 각자의 영역을 지킨다. 지옥의 신을 연기하는 창극 배우들의 거칠고 투박한 소리는 진정 ‘지옥의 소리’를 닮았지만, 사랑과 구원의 상징인 베아트리체 정은혜는 소리꾼의 힘찬 음색에 부드러운 성악 발성을 섞어 오묘한 천상의 소리를 뽑아낸다.

배우들의 연기 열전도 화려하다. 구원을 찾아 지옥에서 천국까지 여행하는 주인공 단테 역의 지현준은 절제와 몰입을 적절히 오가며 대극장 객석을 사로잡고, 국민배우 박정자와 정동환은 각각 애욕의 죄인 프란체스카와 단테의 안내자 베르길리우스로 등장해 긴 혼돈의 여정에 무게중심을 잡는다. 72세 박정자의 연기변신이 특히 흥미롭다. 고전극에서 늘 예언자 등 무거운 역할을 맡던 그녀가 ‘오직 아름다움의 죄를 짓고’ 금지된 사랑의 형벌을 연기하는 에로틱한 몸부림이 사뭇 진솔하다. 단테의 대사대로 ‘형벌인지 축복인지’ 오리무중으로 보인다.

극적인 구조가 없는 원작의 한계는 단테의 내적 갈등을 강조해 극복했다. 지옥에서 연옥, 천국으로의 단계 이동은 곧 철저한 자기 파괴의 고통을 동반한 정신적인 승화 과정으로 그렸다. 단테는 단순한 관찰자로 머물렀던 700년 전 고전을 뚫고 나와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숨 쉬며 공감의 장을 만든다. ‘인생길 반 고비에서 올바른 길을 잃고 어두운 숲에 처했다’는 지옥편 첫 시작 단테의 고백이 공감의 근거가 된다. 서른다섯, 인생의 고개 정상에서 살아온 인생을 부감하며 남은 인생의 좌표를 찾으려는 고민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옥과 연옥, 천국은 결코 내세가 아니다. 깨달음을 향한 내면의 단계를 은유할 뿐이다. 지옥은 죄를 깨닫지 못하는 원초적 본성의 단면들이며, 연옥은 천국을 꿈꾸며 구원을 염원하는 단계다. 지옥은 구원의 희망조차 없지만, 연옥은 죄를 씻느라 지옥보다 더한 고통을 견뎌야 한다. 그럼 천국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무엇이 우리를 구원해줄까?

거대한 연옥의 산을 기어올라 천국의 문이 열리면 한 줄기 빛과 함께 단테 스스로가 찾던 사랑의 화신, 베아트리체의 목소리가 들린다. 결국 천국은 사랑이다. 죄를 인정하고 믿음을 얻어 도달한 천국에는 그리도 염원했던 사랑이 구원의 이름으로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천국의 문은 세상의 고통과 절망에 이어져 있다. ‘나는 가장 높은 곳에만 있지 않아요. 그 어디에서도 나를 찾을 수 있어야 해요’라는 베아트리체의 대사처럼 단테는, 아니 우리는 다시 고통스러운 지옥 한복판에서 ‘살아가야’ 한다. 인생길 반 고비에 처한 어두운 지옥의 숲을 견디는 길은 오직 사랑이며 고통 없는 구원은 인간의 삶에 무의미한 것이니, 죽음의 유혹을 이기고 죄인들 사이에서 숨 쉬며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구원인 것이다.

공연에 앞선 제작발표회에서 프란체스카 역의 박정자는 “난 지옥이 너무 좋아, 천국엔 어차피 갈 수 없고 연옥은 천국만 바라봐야 하니까. 난 그냥 지옥에 살래”라고 말했었다. 그녀는 구원의 속박에서 자유로워 보였다. 지옥마저 사랑할 수 있어야 구원에 이른다는 진리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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