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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제15화 자동차 반세기(13) 서용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운수업의 통제>
만주사변은 한참 꽃필 단계의 우리 나라 운수업계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특히 「트럭」은 군장비취급을 받았다. 함경도·평안도지방에선 자가용·영업용 할 것 없었고 심할 때는 운전사까지 징용 당하기 일쑤였다.
그때부터 통제의 기운이 일기 시작한 것이 태평양전쟁 때는 완전통제시대로 접어들었다.
그 가운데 운전사들의 수난이 더욱 심했다. 징용 당하면 으례「사보타지」했고 그래서 감시도 심하게 받았다.
고장이라고 속여 「엔진」등 「미션」을 고의로 떼어놓고 도망치든가 「엔진」속에 「콤파운드」를 가득 쓸어 넣어 아예 차를 망가뜨렸다.
그 당시 나는 미국인 회사에 근무했던 경력과 영어회화를 할줄안 것이 친미분자라 하여 심심하면 「남방행」공갈을 당했다.
목탄차가 등장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전쟁수행을 위한 전시비상체제는 휘발유 등 모든 물자공급을 어렵게 했다. 특히 군수물자인 휘발유의 부족과 수급통제는 운수업계에 막심한 타격을 안겨다 줬다.
차는 놀릴 수 없고 대용연료를 찾자니 목탄「개스」발생기를 이용한 목탄차로 자연히 개조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실 우리 나라의 목탄차는 1932년 일본육군성에서 연구한 것을 l933년에 조선운송의 죽도사장이 30만원의 예산으로 실용화 한 것이었다. 연통을 달고 숯가마를 장치한채 조수는 열심히 풀무질을 해서 숯불을 피워야만 했다. 그러자니 조수는 물론 운전사까지 한차례운행을 하고 나면 깜둥이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운전사들의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고갯길을 가다가 숯이라도 떨어지는 때면 손님들이 뒤로 미끄러지는 차를 밀어붙여야만 했다.
한관짜리 숯 한부대로 60리를 갈 수 있었지만 소나기라도 쏟아지는 날이면 숯불을 다시 피운다고 법석을 피웠다.
우리 나라에서 목탄「개스」자동차가 처음 가동한 것은 1933년 조선운송소속「트럭」이 화물 4백관을 실고 경성∼춘천사이를 달린 것이 처음이라고 들었다.
그러나 목탄차는 「개스」발생화로·냉각관과 여과기 등의 무게가 60관을 넘어 무척 무거웠기 때문에 아예 가파른 고갯길 밑에선 조수가 풀무질을 마구하여 「개스」를 충분이 발생케한 다음 올라갔다.
거기에다 냉각관은 차밑에 붙어있어 시골길을 달리다가 덜컹거리기만 하면 떨어져, 고치는데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특히 「개스」의 폭발력이 약해 겨울철 눈이라도 내려 얼어붙을 때는 아예 경사진 길을 달릴 생각도 못했다.
목탄차와 함께 등장한 것이 「카바이드」차이다. 목탄차보다 약간 빨리 등장했지만 불편하기는 더했다. 연통을 하루에도 여러 차례 소제해야 했고 「카바이드」찌꺼기 처리에 골치를 썩어 대부분 목탄차 쪽을 택했다.
그 무렵이 1935년 후반이라고 생각된다. 「개실린」소비규정에 따라 휘발유는 거의 구경할 수 없었는데다 대용연료마저 공급이 잘안되고 차의 신규도입은 커녕 고장차를 고칠 부속품조차 없어 자동차운수업은 거의 절망 상태였다.
태평양전쟁이 격화된 1941년 당국은 조선자동차 교통사업령을 개정하여 운수업계를 군수물자수송기관화 해버렸고, 1943년께는 아예 전시육군비상조치를 취했다.
패색마저 짙어진 무렵이었다.
그해 6월1일부터는 「버스」노선을 대폭 없애버린 것은 물론 정비되지 않은 노선도 거리를 줄였다.
또 「택시」는 비상긴급활동용이나 환자구급일 외에는 운행을 철저히 억제했고 화물「트럭」은 아예 징발해 버렸다.
그렇게 되고 보니 민영자동차노선은 폐지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1944년2월로 기억된다. 그때 최후의 운수통제로 운송통제회사 설립명령을 내렸다.
1개도에 1개 업자로 통합되었다. 전북의 경우엔 전북여객이름으로 통합되었고 사장에는 최승렬씨가 취임한 것도 그때의 일이다.
그 무렵까지 우리 나라의 여객자동차운수업자는 1백20명이나 되었고 화물운수업체는 1백4개업자가 조선운송의 통제를 받은 것으로 안다.
여객운송업자중 보통여객운송업자가 1백14명으로 가장 많았고 단체여객과 관광여객업자가 각각 3명이었다.
화물운수업은 구간화물 87개 업자와 특정화물 17개 업자로 나뉘었으며 노선연장은 모두 2만5천7백6l㎞나 되었었다.
이렇게 절망상태에 빠진 운수업계와는 달리 당국은 결전체제의 강화라는 이름으로 수송력을 최대한으로 확보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총독부 철도국이 교통국으로 일원화되고 운수업의 감독권도 교통국으로 이관되었다.
그렇게되니 시골에선 아예 소달구지를 타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철없는 어린이들만 「카바이드」차에서 풍기는 「아세칠린·개스」냄새가 좋다고 차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서글픈 현상을 보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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