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Sunday] ‘진짜 을’과 ‘가짜 을’ … 정치권은 알고 있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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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호 31면

대기업 계열 프랜차이즈 업체의 영업담당 임원 A씨는 최근 고민에 빠졌다. 고민의 시작은 A씨 회사의 가맹점주였던 B씨의 전화. 한 달 전쯤 전화를 걸어온 B씨는 다짜고짜 A씨에게 수천만원을 달라고 요구했다. “당신 회사의 약점을 알고 있고 이 내용을 인터넷에 올리겠다”는 협박이 이어졌다. B씨는 알 만한 국회의원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통화 말미에 “돈은 꼭 현금으로 마련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A씨는 아직까지 그런 요구에 답을 하지 않고 있다. ‘돈을 줄 수 없다’는 입장만 정해놓았다. 그는 “(돈을 주면) 나쁜 선례를 남겨 또 다른 협박의 빌미를 줄 수 있고, 현실적으로 그만한 돈을 회계처리상 문제 없이 구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여야 정치권에선 을(乙)의 목소리를 앞세워 대기업을 압박한다. 몇몇 기업의 직원들이 을에게 함부로 대했다가 회사가 곤경을 겪는 걸 간접 체험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가짜 을’의 출현과 협박이다. A씨의 사례에서 보듯 금품을 요구하는 게 대표적이다. 돈이나 이권을 얻어내려고 노골적으로 영업을 방해하거나 허위 사실을 감독기관에 투서하기도 한다.

최근엔 ‘빵집 알박기’란 괴담이 번지고 있다. 대기업 계열 빵집이 중소형 빵집이 있는 지역 반경 내 500m 이내에선 신규 출점할 수 없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대기업 빵집 입점이 예정된 점포 인근의 상점을 발 빠르게 구한 뒤 불쑥 나타나 “돈을 주면 입점할 수 있도록 우리 가게를 빼겠다”고 한다는 거다.

‘을 지키기’ 분위기에 편승해 아예 생업을 접은 뒤 ‘가짜 을’ 노릇에만 치중하는 사람들도 등장했다. 각종 시위 현장이나 국정감사장이 그들의 활동 무대다. 이들은 다른 가맹점주에게서 활동비 조로 돈을 걷기도 한다. 이거야말로 기업을 괴롭히거나 다른 영세 사업자들의 등을 치는 ‘변종 갑’이 아닐 수 없다. 시쳇말로 ‘우는 놈이 떡 하나 더 먹는’ 세상이 되다 보니 묵묵히 생업에 종사하는 ‘진짜 을’로선 이중, 삼중의 피해를 보는 셈이다. 프랜차이즈 본사 입장에선 조용히 사리에 맞는 말을 하는 점주의 어려움보다는 거리에 나가 소리를 질러대는 이들에게 먼저 대응해야 할 판이다. A씨는 “가짜 을들의 요구에 대응하는 데 우리 역량의 8할가량을 쏟고, 정작 귀담아들어야 할 점주의 요구에는 나머지 2할을 투자하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목소리 큰 몇몇 ‘가짜 을’이 선량한 다수를 ‘어용’으로 몰아세우며 정당한 의견을 내는 일까지 막는다는 점이다. 기업 생태계에서 정부가 갑을관계를 적절하게 규제하는 건 필요하다. 하지만 규제는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는 진짜 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기업이나 정치권 모두 목소리만 큰 가짜 을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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