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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NSA, 외국 정상 35명 무차별 도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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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4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왼쪽)와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각국 지도자들에 대한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광범위한 도청 의혹이 제기된 가운데 메르켈 총리는 이날 “미국 정보 활동의 범위를 정하는 규칙을 올해 안에 만들자”고 제안했다. [브뤼셀 로이터=뉴스1]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외국 지도자들의 휴대전화나 팩스를 광범위하게 도청해 왔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휴대전화나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의 e메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정상들의 통신 내용도 도청됐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25일 NSA의 도·감청 실태를 에드워드 스노든(30)으로부터 입수했다며 NSA의 비밀 문건 내용을 공개했다. NSA 파견직원이었던 스노든은 4개월 전 홍콩에서 자신이 모은 비밀 자료들을 가디언 기자에게 넘겼다.

 가디언이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2006년 10월 NSA는 직원들에게 미국의 백악관·국무부·국방부 등의 관리로부터 해외 주요 인사의 연락처를 확보하도록 독려했다. 그러면서 한 정부 관리가 외국 지도자 35명을 포함해 200명의 전화번호를 제공한 사례를 언급했다. 이어 200개 전화번호 가운데 상당수는 공개된 통로로 구할 수 있는 것이지만 43개는 새로운 정보라며 이들을 새로운 과제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과제로 지정한다는 것은 도청 대상에 포함시켰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문건에는 ‘이 전화번호에서는 가치가 있는 정보가 나오지 않았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가디언은 이 문서에 35명의 명단이나 전화번호는 들어 있지 않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문건 내용을 근거로 외국의 정치·군사 지도자들에 대한 도청이 무차별적으로 이뤄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신문은 미국 정부 측에 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으나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가디언이 제시한 문서가 만들어진 2006년은 조지 W 부시 2기 정부 때였다. 당시 한국의 노무현정부는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억제 전략과 전시작전권 이양 문제 등으로 미국과 갈등을 빚었다. 따라서 한국의 주요 인사들도 도청의 표적이 됐을 가능성이 있다. 지난 6월 말 가디언은 NSA가 한국·일본을 포함한 38개국의 미국 주재 대사관에 대한 도청과 해킹 등으로 정보를 수집한 흔적이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7월 2일 한국 외교부 부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사실관계를 확인 중이고 결과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외교부가 24일 박주선(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은 일반적인 정보 활동에 대해서만 설명하며 한국 측의 문의에 정확히 답변하지 않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3일 메르켈 총리의 항의 전화에 “현재 모니터링을 하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 언론은 이를 과거의 도청을 시인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탈리아 주간지 렉스프레소는 스노든의 자료에 이탈리아 정부 주요 인사들의 전화 통화와 e메일이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에 의해 도청됐음을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보도했다.

 한편 메르켈 총리는 24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서 미국에 정보 활동 범위를 정하는 새로운 규칙을 올해 안에 정하자고 제안했다고 밝혔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등 EU 지도자들은 25일 “미국과의 강력한 환대서양 파트너십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EU 법률 대표단을 28일 미국에 파견해 NSA 관계자들의 해명을 듣기로 했다.

런던=이상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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