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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온도계의 눈금 하나, 그 안의 과학 대장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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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온도계의 철학
장하석 지음, 오철우 옮김
이상욱 감수, 동아시아
544쪽, 2만7000원

뜨거워, 따듯해, 더워, 찌는데, 후끈해…. 이처럼 더위를 표현하는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세상의 다른 언어에서도 마찬가지다. 미묘한 느낌의 차이를 표현하는 말이 다양한 것은 좋지만 누구나 합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차이를 서로 비교한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

 서구의 근대과학은 감각을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몰두해 왔다. 로크나 갈릴레오, 뉴턴 같은 서구의 과학자나 철학자는 길이나 부피처럼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사물의 성질을 1차 성질이라고 했고, 맛이나 냄새 같이 수로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의 속성을 사물의 2차 성질이라고 했다. 감각에 의존된 2차 성질을 계량화된 1차 성질로 바꾸는 일이 온통 근대과학의 과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의 과학도 마찬가지다. 특히 뜨겁고 차가운 감각의 정도를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은 근대인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온도계가 만들어졌겠지만.

[강일구]

 겉보기에 사소한 듯하지만 온도계 하나와 관련한 지식의 깊이를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온도계가 만들어지는 유럽 18세기 역사적 상황을 통해 과학의 진보가 무엇인지, 믿음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진리가 과연 진리였는지, 그리고 안다는 것이 과연 아는 것인지 등의 문제를 다룬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의 『온도계의 철학』 덕분이다.

 이 책은 2004년 출간돼 국제 과학철학계 최고의 저술상까지 받았는데, 늦게나마 이번에 한국어로 번역됐다. 장 교수는 이 책에서 철학 및 역사가 어떻게 과학과 상보적인지를 기술한다. 그가 인용한 많은 기초자료는 수장고에 묻혀진 1차 원전이었기에 더더욱 학술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된다.

 온도계를 만들려면 온도가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한다. 온도를 잘 알려면 먼저 온도계가 필요하거늘 온도계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바로 이런 근본적인 질문은 장 교수가 어릴 때부터 품었던 의문이었다고 쓰고 있다.

 어릴 적 아이들은 엄마에게 엄마의 엄마, 그 엄마의 엄마, 엄마의 끝은 누구인지를 묻곤 한다. 엄마들은 이런 질문에 당황한다. 당황할 필요 없다. 하나의 정답을 만들려는 진땀 나는 시도를 하려 말고 그냥 아이에게 지치지 말고 이것저것 응대만 해주면 되니까.

 그런 질문은 과학에서 더 중요하다. 저자는 그런 질문의 시작점을 ‘고정점’으로, 그런 지지치 않는 응대를 다양성의 ‘반복’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고정점을 찾아가는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실체론이나 본질론 같은 형이상학적 마술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의 문장 하나를 인용한다.

 “토대의 토대는 무엇일까 하는 물음은 잘못된 물음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토대라고 알고 있는 우리 집의 지반도 알고 보면 편평한 땅이 아니라 불안정한 지구의 둥근 땅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토대는 그냥 우리의 믿음일 뿐이며 실제로 집을 지을 수 있는 이유는 “그저 우리가 지구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429~430쪽)

 장 교수의 지식론은 비판을 더러 받았지만 지난 25년여 동안 국제 과학철학계에서 충분히 검증됐다. 너무나 유명하여 일반 독자들도 익히 알고 있는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과 칼 포퍼는 20세기 대표적인 과학철학자이지만 두 사람 의견은 꽤나 상반적이다.

 반면 두 사람의 상반된 주장을 섬세하게 엮어내는 장 교수의 해석을 나는 그의 글 행간에서 읽을 수 있었다. 18세기 온도계의 매질로서 사용되었던 수은·에테르·알코올·공기·황산·아마씨기름·소금물·올리브기름·석유·점토 등에 얽힌 이야기를 읽으면서 당대 과학자의 노력이 지나간 오류의 역사가 아니라 존중돼야 할 지식의 구조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의문을 갖고, 비판하고, 잊혀진 물음을 되살려서 그 답을 모색하는” 철학과 역사의 시도는 과학의 진보를 생성하기도 하지만 우리 삶의 내적 토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은 더 읽을 만하다.

 부분적으로 어렵게 느낄 수도 있지만 한국어 번역이 정확하고 동시에 내용을 숙지한 상태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긴 호흡을 갖고 따라 읽어낼 수 있다. 저자는 모든 문제에 유일하고 절대적인 해답이 있을 것이라는 강박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내내 강조한다. 상대의 이야기가 무조건 틀리다고 말하기 전에 상대를 다르다고 봐줄 수 있음을 저자는 ‘존중의 원리’라고 했다. ‘존중의 원리’가 과학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구현돼야 한다는 것을 이 책에서 공감했다.

최종덕 상지대 교수

●최종덕   독일 기센대학에서 철학과 물리학을 전공했다. 개인 홈페이지 ‘철학의 눈(eyeofphilosophy.net)’을 통로로 대중과 과학철학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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