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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8선 돌파와 북진>(9)「6·25」21주 3천여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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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평양으로>(6)
10월 19일 상오 11시쯤 평양은 국군 제1사단, 제7사단, 그리고 미 제1기갑사단에 의해 완전히 탈환됐다. 「프랭크·밀번」소장의 미 제1군단이 10월 9일 38선을 넘어 공격을 개시한지 꼭 10일만에 북괴의 아성은 무너진 것이다. 김일성은 22일에 방송을 통해 그들 수도를 신의주로 옮겼다고 보도했다. 온 겨레의 숙원인 통일이 정말 눈앞에 다가온 느낌이었다.
그럼, 이제 관계자들로부터 평양 돌입 때의 상황과 그 후의 시 표정 등을 들어보겠다.

<김일성 대학엔 고급식품더미>
▲조재미씨(당시 1사단 제15연대장=중령·예비역준장·현 사업·55) 『수안서부터 백선화 사단장은 3개 연대를 전부 정면에 내세워 총공격태세를 갖추게 했어요. 예비부대였던 우리 15연대도 이때부터 평양공격에 나서 우선 시 근교인 승호리로 진격했습니다. 공산치하에서 고생하던 우익청장년들이 발벗고 나서 수색과 정보활동에 협조해 줍디다. 나는 이 청장년들로 1개 대대를 더 편성해서 우리 15연대는 4개 대대가 됐어요. 무기는 북진하며 노획한 것을 나누어 주었구요. 동 평양 비행장의 일부도 우리 연대 작전구역 이었어요. 제1대대를 시켜 공격, 18일 밤에 비행장을 점령했어요. 사병들이 파괴된 적기의 「프러펠러」파편을 뜯어옵데다.
제1대대는 계속해서 대동강을 도하, 시내로 돌입하여 김일성 대학을 거쳐 모란봉으로 올라갔어요. 뒤따르던 나머지 대대도 도하하려다가 적의포격이 심해 강을 못 건넜어요. 이날 연대 본부는 승호리의 큰 민가에 두고 나는 여기 있었어요. 저녁에 집주인이 진수성찬으로 극진히 대접해줍디다. 이대음악과를 나왔다는 주인 딸은 고운 목소리로 명곡을 불러주어 미군고문이 여간 기뻐하지 않더군요. 19일에 동 평양 비행장에 도착해 있으니까 미제1기병사단이 10분쯤 뒤에 들어옵데다. 이날 동 평양 비행장에서 쏴대는 축하포격 때문에 전날에 도하하여 시내에 돌입했던 우리연대 제1대대는 큰일날 뻔했어요.
이날 우리연대 주력도 대동강을 건너 김일성 대학에 도착하여 식당에 들어가 보니까 소제 고급식품이 가득합데다. 공산당 간부들은 우리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호화로운 생활을 한다는 걸 느낄 수 있더군요. 잔류한 가난한 시민들이 공산당 고급 간부 집을 터는 모습이 여기저기 눈에 띄구요. 이날 저녁에는 연대정보주임 오 소령이 평양의 자기 집에 초대를 했어요. 8·15후 월남한 오 소령의 가족들도 다 무사히 견디어 냈더군요. 백 사단장 누님도 무사히 있다는 소식이 들어와 나는 즉시 정보과에 만약 그분이 적 치하에서 몰수당한 가옥이나 물건이 있으면 찾아드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어떤 공장에 가니까 생고무가 그득히 쌓여 있어요. 서울로 실어다 팔려고 하니까 김종원 헌병대장이 철저히 통제를 해서 안 된다는 거예요.

<모란봉 거쳐 서 평양에 진격>
최영해 부사단장과 상의해서 승낙을 받고 10여「트럭」을 실어냈어요. 이걸 판돈이 무려 1억 원 인데 「드리쿼터」 한대에 가득해요. 이 돈은 연대공금으로 쓰기로 하고. 한 푼도 유용하지 못하도록 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써도 남아돌아 중사이상 연대장까지 일률적으로 90만원씩 나누어 가졌어요. 이것은 나중 일인데 어느 장교가 그 돈을 자기가족에 부쳤더니 부인이 헐레벌떡 달려왔어요. 남편이 전사해서 조위금인줄 알았다는 거예요. 평양탈환 후 백사단장한테 평양 입성 식을 갖자고 건의했더니 순천에 낙하한 미군공수부대를 지원해야 한다고 이틀 밤을 자고 그대로 떠났습니다.
▲고인식씨(당시1사단 제15연대 제1대대 3중대장=대위·예비역대령·현 나주 호남 비료사 자재부장·42) 『우리 3중대는 19일 승호리서 대동강 상류를 건너 사동으로 돌입했습니다. 시내에는 괴뢰군 평양방위사령부 연락병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갔다합디다. 상오 11시에 모란봉에 도착한 다음 다시 서 평양을 향해 진격해 나갔어요. 거리에는 여기저기 「바리케이드」가 쳐있고 그 옆에는 수류탄을 쌓아 놓았어요. 괴뢰군 연락병을 한 명 잡았는데 이 자는 아직 국군이 들어온 줄 모르고 신분증을 보이며 빨리 통과시키라고 을러댑디다. 이때는, 군복도 서로 비슷하고 또 후에 알았지만 괴뢰군은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해 저희들끼리 국군으로 가장해서 검문을 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하루에 60리 정도 진격한다고 계산, 20일 저녁쯤 시내에 돌입하리라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괴뢰연락병은 우리사병들이 경상도사투리를 쓰는걸 듣고야 국군인줄 알고 항복하데요. 하오 3시쯤 시내를 통과해서 서 평양으로 계속 진격해 들어갔어요. 5시쯤 적 포병사령부 장교식당을 습격, 식사중인 장교30여명을 생포했습니다. 이자들도 처음엔 도리어 우리를 보고 어느 부대며 지휘관이 누구냐고 호통을 칩데다. 총을 들이대고 항복을 권고하니까 그제야 국군인줄 알고 모두 순순히 손을 들더군요. 간혹 저항하는 적을 소탕하며 시가전을 계속 하는데 하오 6시쯤에 동 평양 비행장에 11대가 도착했어요. 시내에 대고 대전차포로 「축포」를 막 쏴댑데다.

<시민들 소 잡고 떡 빚어 환영>
이때 연락이 잘 안 돼 우리 중대사병 3명이 희생되는 불행을 가져왔지요. 우군의 포탄을 피해 우리중대는 다시 모란봉으로 기어올랐지만 밤이 되니까 포격이 더 심해졌어요. 할 수 없이 모란봉을 넘어 산 뒤쪽에 있는 민가로 들어갔어요. 주인은 의사인데 친절하게 잠자리를 마련해 줍데다. 아침이 되니까 부근 시민들이 모여와 소를 잡고 떡을 빚으며 환영해 준다고 야단들이예요. 지하에 숨어있던 우익청년들도 모두 쫓아와 협조를 아끼지 않구요. 이들은 우리와 함께 온정일 시내에서 숨은 공산당원을 색출하는데 아주 용감하게 나섰지요. 우리 중대는 이날저녁까지 괴뢰군 1백 50여명을 사로잡았습니다.
이때 공교롭게도 내 중학동기동창의 괴뢰병사도 한 명 잡았어요. 정말 심경이 착잡합데다. 그 친구는 처음에 머뭇거리며 고개를 돌리고 말을 못했지만 나중에 국군에 편입돼 잘 싸웠고, 지금은 서울서 살고 있지요.
저녁에 김일성 대학으로 오니까 사단이 모두 들어와 얼싸안고 기뻐했습니다.』
▲김점곤씨(당시 1사단 12연대장=중령·예비역육군소장·현 안보국제문제연구소장·주한「코스타리카」명예총영사·경희대교수·48) 『괴뢰군 3개 사단이 평양을 방어했습니다. 말은 3개 사단이지만 병원·장비·사기 등이 형편없었지요. 어쨌든 그들은 이들 3개 사단을 희생타로 이곳에 배치하고 대동강 교를 폭파해 후퇴 못하도록 했어요. 동 평양 시가지 건물 안에서도 사격을 가해와 약 1시간동안 이것을 소탕하고 목표지점인 대동강교의 동쪽 「로터리」에 도착했어요. 이때가 19일 상오 10시 45분. 역사적인 순간이죠. 15분쯤 후에 미제1기병사단이 들어옵디다. 국군에 배속돼있던 미 공병 중대가 미리 만들어놓았던 간판을 우리가 들고 환영을 했더니, 기병사단은 약이 바짝 오르는 모양입디다.
그 간판에는 영어로 「미 제1기병사단을 환영한다. 국군1사단 12연대 백」이라고 쓰여 있었어요. 원래 미 공병 중대는 미 제1기 병사 단이 아니꼽다고 이런 짓궂은 짓을 한 거예요. 그리고 기병사단도 1사단에 지지 않으려고 몹시 서둘렀는데 우리가 목표지점에 먼저 와서 뒤 처진 자기들을 환영해주니 약이 오를 수 밖에요. 동 평양의 건물 등은 비교적 덜 파괴됐고, 시민들도 꽤 많아요. 역의 저탄장서부터 주민들이 언제 마련해두었는지 감추었던 태극기를 들고 열렬한 환영을 합디다., <사병들, 노획한 향수 마구 뿌려>
마구 춤을 추고 우리를 끌어안고, 부인네들도 서슴지 않고 국군을 끌어안아요. 낙동강에서부터 북진하는 동안 여러 곳 주민들의 환영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지방성격이 뚜렷하더군요. 제일 무표정한곳이 충북입디다. 북으로 올라갈수록 마음을 행동으로 나타내데요. 어떤 창고 속에 맥주가 가득한 것을 발견하고, 한 미군이 나누어 마셨어요. 또 어디서 찾았는지 소련의 「라일락」향수가 엄청나게 나왔어요. 사병들은 조그마한 향수병을 주머니에 가득 넣고 다니며 마구 몸에 뿌려 이상한 냄새를 풍기고 다녔어요.
숭실 대학의 인민도서관에는 책들이 많기도 합디다. 소련의 「볼셰비키」혁명사 등 공산당사에 관한 서적이 거의 다 우리말로 번역돼 있고, 조선공산당 등에 관한 문헌도 많아요. 나는 사병을 데리고 꼬박 하루동안 이 책을 챙겼어요. 똑 같은 책을 세 무더기로 나누어 두 무더기는 정보국 등에 주고 한 무더기는 내가 가질 생각이었어요. 다시 북진할 때 이 책들을 후방요원에게 맡겼는데 나중에 모두 태웠다는 거예요. 이유는 공산당서적이라고 공산주의 연구에 아주 귀중한 자료였는데 아까운 노릇이었지요.

<미 대령, 10일전에 평양 잠입>
평양에는 그때까지도 기생 촌의 잔재가 있습디다. 이들은 8·15 해방 후 제대로 기생 노릇을 못하고 공산당간부 등 실력자들의 내연의 첩 노릇으로 연명해왔다고들 해요.
그리고 기생 촌은 우리 쪽 지하첩보원들의 거점이 된 일도 있어요.
미군특수부대의 B대령이 통역「지미·김」(김길준·고인)을 데리고 평양돌입 10일전에 비행기로 낙하, 기생 촌에 숨어서 첩보 활동을 한 일이 있어요. B대령은 콧수염을 기르고 노서아인으로 가장, 어떤 기생집 다락에 숨고 「지미·김」이 기생을 시켜 포로가 된 「딘」 소장의 행방을 정탐했어요.
「딘」 소장은 이미 북으로 끌려가 평양에 없다는 것을 보고했더니, 본부에서 곧 총 공격이 있다면서 「핼」기를 산중으로 보내 이들은 무사히 탈출했어요. B대령은 나중에 주한미군사의 고위직까지 지냈는데 62년 어느 날 나와 술 마시다가 자기가 그런 일을 했다고 합디다.
▲허순오씨(당시 8사단 21연대 군수참모=소령·예비역 육군준장·현 한전 이사·50)=우리연대는 점령 4일째인 10월 23일에 평양으로 들어갔지요. 강동에다 식량을 두고 사들인 배추로 8사단 전 장병용 김장을 담갔어요.
평양에서 제일 큰 여관인 동양여관에 숙소를 정했는데 주인 아들인 양이집 군과는 내 중학동창이었어요. 그도 적 치하에서 용케도 살아남았더군요. 이 여관에서 나는 우연히 고향의 노인 한 분을 만났어요. 평북 구성에서 면장을 지낸 장용관옹을 만났는데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가 나중엔 알아보고 퍽 반가와 하시더군요. 나는 장 노인을 제일 좋은 방에 모시고, 소주 한 병과 빈대떡을 사서 들여보냈어요. 한데 그 이튿날 아침에 야단이 났어요. 장 노인이 빈속에 소주 한 병과 빈대떡을 다 잡수시고 관격을 일으켰다는 거예요. 급히 차편으로 장 노인을 아들집으로 모셔갔는데 그만 그 이튿날 세상을 뗘났어요.
지금도 장 노인의 아들을 만나면, 내가 어르신네를 돌아가시게 했다고 반 농담으로 이야기하지요. 서 평양에 살던 내 형님 댁을 찾아갔더니, 형님은 한 달 전에 노력동원에 나갔다가 폭격으로 돌아가셨더군요. 시내에서 우연히 김명복 은사(현 경희대부총장)님을 만났어요. 내가 「사인」한 증명서를 한 장 만들어드려 김 선생님은 38선을 넘어 월남하셨지요.

<흑인 병의 부녀겁탈로 난처>
이번에는 한 종군기자 눈에 비친 평양탈환전후의 표정을 살펴보겠다.
▲이혜복씨(당시 경향신문종군기자·현 동아일보 편집부국장·48)『그 해 10월 16일에 김진섭·김우용씨와 함께 3명의 종군기자가 앞서간 1사단을 뒤쫓아 북으로 출발했어요.
38이북 수복지구로 들어가니까 청년들이 자위대를 구성, 총을 들고 초소를 경비하고 있어요. 그런데 총 쏠 줄을 몰라, 우리가 차를 세우고 가르쳐주기도 했어요.
19일에 1사단이 동 평양을 점령하는 것까지 보고 서울로 돌아와 평양수복의 호외를 냈지요. 20일에 신문을 가득히 싣고, 다시 평양으로 달렸어요. 시내로 들어가는데 어떤 사람들이 울먹이며 호소를 합디다. 미군이 오기에 남녀 할 것 없이 환영을 했는데 흑인사병들이 여자를 욕보인다는 거예요. 몹시 딱했지만,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적 오열, 김일성 대학 등 방화>
이때 평양 시내의 웬만한 공공건물은 무질서하게 접수됐어요. 아무 기관이나 마구「접수」라는 딱지를 붙였어요. 백묵으로 그냥 벽에 쓰기도 하구요. 어떤 사람들은 날보고, 이 건물을 선생이 접수해주어야 우리가 안심하고 지킬 수 있다고 사정해 백묵으로 종군기자 아무개가 이 건물을 접수했다고 써주기도 했어요. 불안한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심정들이었나 봐요.
국군이 평양을 완전 점령하고 2∼3일 후에 화신과 김일성 대학에 불이 났어요. 적 오열의 소행이 분명하지요.』 평양탈환의 기쁨과 흥분은 이승만 대통령이 환영대회에 참석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국군이 평양에 입성한지 10일 만인 10월 30일에 이승만 대통령은 신성모 국방과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등을 대동하고 아군수송기를 타고 평양에 내렸다. 일행은 즉시 수만 명의 평양시민이 운집한 시청「발코니」에 도착하여 역사적인 환영대회는 개최됐다. 이때의 감격을 대통령을 수행한 정일권 참모종장(당시)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이 대통령, 적 치하 고생 위로>
『그때 이 대통령을 보고, 열광 환호하던 평양시민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나 자신도 벅찬 감격을 느꼈구요. 대통령의 연설은 지금 다 기억이 안 나지만, 대충 이제 남북동포가 다함께 같이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됐으니 기쁘며 적 치하에서의 고초를 위로하는 내용이었어요. 그런데 그 후가 문제였어요. 대회가 끝나고 대통령께서는 「지프」를 타시고, 평양시민들 속으로 마구 들어가면서 악수를 해요.
그리웠던 애국동포의 환영에 도취되신 거지요. 그러나 수행한 우리들은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탈환한지 10일 밖에 안 되는 적의 아성인데 환영군중 속에 적 오열이나 패잔병이 없다고 누가 보장합니까. 참 대담한 행동이었어요. 시청광장을 대통령을 모시고 한 바퀴 돌고 나오니까 늦가을인데도 내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었어요. 대통령의 신변을 염려하고, 나도 흥분 감격해서 그렇게 된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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