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동 관광산업이 죽어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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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초입에 자리잡고 있는 속초시 설악동 집단시설지구.1970∼80년대만 하더라도 경주시와 더불어 국내 관광 1번지로 손꼽혀 30대∼50대의 성인이라면 수학여행이나 신혼 여행 등을 통해 한번쯤 추억을 만든 곳이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설악동은 깊은 나락에 빠져들고 있다.인근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대형 콘도미니엄에 고객을 빼앗기고 있는 데다 최근 금강산 육로 관광 시대가 열리면서 ‘아예 고사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실태=지난 2일 낮 12시쯤 설악동 집단시설지구 안 식당가.대로변에 위치한 10여 곳의 식당 중 절반 이상이 문을 열지 않았다.

그나마 영업을 하고 있는 업소도 대부분 텅 비어 있다.

식당 앞 인도는 최근 내린 눈을 그대로 방치해 빙판길이다.설악동의 현 주소를 한눈에 보여주는 듯했다.

7년째 식당업을 하고 있다는 지무동(47)씨는 “겨울철만 되면 손님 1명도 받지 못하는 날이 수두룩한데 얼음을 깰 기분이 나겠느냐”며 “이대로 가면 설악동의 미래는 없다”고 한숨 지었다.

이면 도로로 들어서자 사정은 더욱 나빴다.

오락실과 식당·나이트클럽 등 15여 개 상점이 입점해 있던 지상 2층 규모의 한 상가 건물에는 식육점과 식당 등 2곳만 영업을 하고 있을 뿐이다.나머지는 문을 닫은 지 이미 오래된 듯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른다.

바로 옆 상가건물에도 셔터를 내린 상점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인근 숙박단지도 영업난을 겪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18년째 여관업을 해온 성용학(68)씨는 “손님이 하루 한두 개 객실만 들어 적자지만 할 수 없이 문을 열고 있다”며 “2년 전 리모델링을 하면서 은행에 낸 빛 3억원의 이자도 못내 경매에 넘어갈 판”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몇 년째 매물로 내놓았으나 팔리지 않아 방치되고 있는 여관이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번영회에 따르면 설악동 지역 82개 여관 중 겨울철에 영업을 하는 곳은 불과 20여 곳.

매물로 내놓은 곳만 10여 곳이 넘으며,4곳은 경매 매물로 나왔으나 응찰자가 없어 계속 유찰되고 있다.

1백30여 곳의 일반 상가도 80여 곳이 문을 닫았으며 이중 50여 곳이 폐업 신고를 하거나 매물로 내놓았다.

◇침체 원인은=설악동 집단시설지구는 정부에서 지난 76년부터 관광지 개발을 위해 1백13만 여㎡ 부지를 조성해 숙박단지와 상업단지 등으로 분양했다.

현재의 소공원 매표소 안에 있던 상당수의 상인들이 이때 이곳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지난 80년 자연공원법이 제정되면서 층수 제한(3층)과 용도 변경 불가 등의 각종 규제에 묶이다 보니 시설이 노후화되고 영세화됐다.

이런 와중에 80년대 중·후반부터 속초시 노학동과 고성군 토성면 등 인근 지역에 대형 콘도미니엄이 잇따라 건립되면서 경쟁력을 서서히 잃게 됐다.

특히 수학여행단 등 단체 숙박객의 유치를 놓고 설악동 숙박업소와 콘도미니엄 업체들이 대립하자 정부가 콘도미니엄의 단체 여행객 유치를 한때 금지했으나 98년 ‘법령에 근거가 없다’며 이를 폐지한 것도 설악동의 침체를 부채질한 요인이다.

결국 전체 매출의 70%를 차지하는 단체 관광객마저 콘도미니엄에 잠식당하자 설악동 숙박업소와 일반 상가가 영업 기반을 잃으면서 급속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회생책은 없나=상인들과 지역 사회단체의 요구사항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층수 제한과 용도 변경 금지 등의 각종 규제로 개발의 족쇄로 작용하고 있는 자연공원법의 완화다.

집단시설지구의 경우 이미 훼손된 곳인 만큼 시설 확충 등을 통해 공원 밖 콘도미니엄 등 대형 숙박업소와 경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달라는 것이다.

자연공원법의 완화가 불가능하다면 설악권 관광 개발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해 달라고 요구한다.
금강산 관광과 연계한 설악권 개발은 정부가 공약으로 내걸었던 사안인 만큼 성실히 이행해 달라는 것이다.

이마저 받아들일 수 없다면 정부에서 6백9가구의 여관·상가 주민들을 모두 국립공원 밖으로 이전해 달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정부에서 관광지 개발 명목으로 집단시설지구를 조성해 놓고 이제 와서 ‘나 몰라라’하는 것은 무책임한 처사라는 주장이다.

하상석(67)번영회장은 “정부에서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수용하지 않을 경우 설악동 지역의 공동화는 계속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고 말했다

◇관련당국 입장=정부 당국은 이러한 설악동 상인들의 요구를 수용하기 힘들다는 입장이다.

환경부 최병철 자연공원과장은 “자연공원법은 자연자원 보존을 위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다뤄야 하기 때문에 설악동 지역만을 위해 규제를 완화할 수 없다”고 밝혔다.

특별법 제정에 대해서도 난색을 표한다.

문화관광부 김찬 관광정책과장은 “특정 지역을 위한 특별법은 다른 지역과 형평성 문제가 생길 수 있어 받아들일 수 없다”며 “다만 금강산과 설악산을 연계한 관광 상품 개발과 관광 활성화 방안은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속초=홍창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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