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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사, 오늘부터 계열사 투기등급 채권 못 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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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1년3개월. 금융당국이 동양증권의 동양그룹 채권 판매를 금지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지난해 7월 금융감독원 건의로 논의가 시작된 관련 규정 개정안이 이제야 시행돼서다. 그사이 동양그룹의 5개 계열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투기등급 채권에 투자한 개인투자자 4만 명(투자액 1조6000억원)은 손실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국정감사에서 “전형적인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행정”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금융위원회는 23일 증권사가 계열사의 투자부적격 등급(투기등급·BB+ 이하) 회사채·기업어음(CP) 판매를 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금융투자업규정 개정안이 24일부터 시행된다고 밝혔다. 개정안에 따르면 증권사는 앞으로 계열사의 투기등급 회사채·CP를 투자자에게 권유하거나 펀드·신탁에 편입할 수 없다. 문제는 이 개정안이 타깃으로 했던 동양증권은 이미 계열사 채권을 팔 수 없는 상태라는 점이다. 법정관리 신청과 함께 계열사의 신용등급이 채권 발행이 사실상 불가능한 C~D등급으로 떨어져서다.

 한 증권사 임원은 “동양증권이 실컷 투기등급인 계열사 채권을 판 뒤 시행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말했다.

 다른 증권사 중에서도 대상이 되는 곳은 한 곳뿐이다. 골든브릿지투자증권이 계열사인 골든브릿지캐피탈(신용등급 B+) 채권을 22억원어치 판 게 전부다. 골든브릿지투자증권 관계자는 “투자자가 11명일 정도로 판매 규모가 미미하다”며 “이번 개정안이 영업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금융위의 규정 개정이 늦어 피해를 키웠다고 지적한다. 민주당 이종걸 의원은 “동양증권을 포함한 업계 의견을 수렴하느라 금융위의 법안 개정이 늦었다”고 비판했다. 같은 당의 김영환 의원은 “원래 유예기간을 3개월로 하려 했다가 6개월로 늘리는 바람에 동양증권이 7308억원의 채권을 더 팔 수 있었다”고 밝혔다. 반면 금융위는 “정해진 절차를 거쳤을 뿐 일부러 늦춘 게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금융위와 국회 정무위원회에 따르면 회사채·CP 규정 개정은 지난해 7월 금감원의 건의 뒤 9월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금융위는 전문가와 업계 의견수렴을 거쳐 11월 5일 개정안을 발표한 뒤 법에 따라 40일간 입법예고를 했다. 당시 이 개정안의 유예기간은 3개월로 잠정 결정돼 있었다. 그런데 12월 초 동양그룹은 금융투자협회를 통해 “유예기간을 1년으로 늦춰달라”고 요청했다. 회사채·CP를 줄이는 자구책도 함께 제출했다.

 금융위는 동양의 자구노력을 받아들여 유예기간을 6개월로 연장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애초 3개월은 규제개혁위원회에서 ‘과도한 규제’라는 지적을 받지 않기 위해 일단 유예기간을 짧게 잡아놓은 것이지 최종 결론이 아니었다”며 “3개월로 했다면 시장에 미치는 충격이 지금보다 더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규제개혁위에서 다른 규제안들과 함께 심사하다 보니 기간이 오래 걸려 시행이 늦어진 측면도 있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서는 이번 개정안이 투기등급 바로 위 등급인 BBB급 계열사 채권을 가진 증권사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 두 단계만 신용등급이 떨어지면 더 이상 해당 계열사의 회사채·CP를 팔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금감원은 이날부터 동양 사태 관련 국민검사청구 특별검사반 운영에 들어갔다. 최종구 수석부원장을 반장으로 총 80명이 투입돼 동양증권의 채권 불완전판매와 계열사 부당지원 여부를 검사한다.

이태경 기자

투기등급 신용평가사가 채권 발행 기업의 원리금 상환 능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판단할 때 매기는 신용등급이다. BB+ 이하 등급이 해당된다. 투자 위험이 높다는 뜻에서 투자부적격 등급이라고도 한다. 반대로 BBB- 이상 등급은 원리금 상환 능력이 양호하다고 판단해 투자적격등급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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