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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던지기 전 마지막 통화 그들은 위로받고 싶어 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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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지난 15일 밤 서울 마포대교에 설치된 생명의 전화 옆으로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생명의 전화 위에는 시민들이 남긴 ‘넌 혼자가 아냐’ ‘죽지 마요 살아요!’ 등의 메시지가 적혀 있다. 생명의 전화는 시민들이 상담을 하거나 119상황실에 신고하는 데 사용된다. [박종근 기자]

“따르릉∼따르릉.” 지난 10일 오후 8시16분. 서울 이화동 ‘생명의 전화’ 사무실 전화벨이 적막을 깼다. “여보세요, 생명의 전홥니다.” 수화기를 들기 무섭게 한 10대 청소년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친구들이 여기가 자살하기 좋대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전화가 걸려온 곳은 마포대교 남단. ‘정말 뛰어내리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그래, 마포대교에 와 보니 어때요? 한번 주위를 둘러봐요.”(상담원)

 “경치가 좋네요. 죽기 딱 좋은 날씨 같아요”(학생)

“죽기 좋은 날씨네요” 가슴 철렁한 전화

10일 서울 이화동 ‘생명의 전화’ 사무실에서 상담을 하고 있는 최장숙 상담원. [박종근 기자]

 최장숙(67·여) 상담원이 학생과 대화를 이어갔다. 한마디 한마디 주고받는 사이 학생은 울음을 멈췄다. 그리고 가슴속에 담고 있던 이야기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16세)이었다. 성적에만 관심을 갖는 아버지 때문에 마포대교로 향했다고 한다. “학교 성적이 평균 90점을 넘기지 못하면 절 때렸어요. 장교 출신이신 할아버지께서 엄하셨는데, 그걸 저한테 복수하려는 것 같아요.”

 10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학생은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고 심호흡을 해보라”는 최 상담원의 말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30분 뒤 마포대교 북쪽에서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다는 여성이었다. 그는 “올해 졸업했는데 취업도 안 되고 잘못 살아온 것 같다”며 한탄했다. 최 상담원은 “목소리도 예쁜데 왜 취직이 안 될까”라는 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에게 “A4 용지 가득 지금까지 살면서 고마운 일들을 써내려가 보자”고 다독였다. 8분 동안 “당신은 뭐든 할 수 있다”는 말이 수차례 건네졌다.

 이날 오후 6~9시 이화동 생명의 전화 사무실엔 7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마포대교와 서강대교에서 각 6통, 1통이 왔다. 생명의 전화에선 ‘벨이 한 번 이상 울리게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하지만 3통은 받기 전에 끊겼다. 2통은 채 1분을 통화하기 전에 끊어졌다. ‘혹시 뛰어내린 사람이 없었을까’ 하는 걱정에 경찰 등에 수소문해봤지만 다행히 신고된 사건은 없었다.

일일이 고민 듣고 격려해주니 마음 돌려

 생명의 전화는 1963년 호주의 앨런 워커 목사가 처음 만든 뒤 국내엔 76년 정식 설립됐다. 2011년 7월부터는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 등의 도움을 받아 한남대교 등 한강 다리 위에 SOS 생명의 전화를 설치했다. 자살시도자들의 마음을 돌리거나 긴급상황에 신속한 신고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다. 현재 한남·마포·원효·한강·서강대교 등 5곳에 4대씩 20대의 전화가 있다.

 본지는 일주일간 사랑의 전화 사무실과 마포대교를 찾았다. 마포대교는 자살을 가장 많이 하는 장소 중 한 곳이다. 지난해 72%(118통)의 전화가 이곳에서 걸려왔고 올해 실제 자살시도자만 지난달까지 65명에 달한다. 지난해 생명의 전화를 통해 삶의 터전으로 복귀한 사람은 163명에 달한다. 상담 유형별로 살펴보면 진로 문제가 40건으로 가장 많고 이성 문제(22건), 생활고(18건), 외로움(18건)이 뒤를 이었다.

자살 시도자 구조율 56% → 95%로 높아져

 기자는 11일 오후 8시14분 마포대교에서 후드 점퍼를 푹 덮어쓰고 눈물을 훔치는 유모(14)양을 발견했다. 유양은 “소유욕이 강해서 친한 친구가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난다”며 “오늘 절교 선언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기자가 상담원에게서 배운 상담 기술을 떠올리며 “나도 중학생 때 비슷한 일이 있었다”며 공감을 표하자 극복 방법을 물어왔다. 유양은 결국 “가슴속 얘기를 이야기하고 나니 한결 낫다”며 돌아갔다.

 15일 오후 11시쯤엔 혼자 있는 기자를 자살 시도자로 오인한 20대 남녀 3명이 다가와 만류하기도 했다. 서울시 재난대응과 관계자는 “그동안 119에는 단순 목격자 위주의 신고가 들어왔는데 지난해 생명의 전화 및 112와 연계해 통합시스템을 만들면서 투신 직전의 자살 시도자 구조율이 높아졌다”고 밝혔다. 56.1%에 불과했던 생존 구조율은 올 9월까지 94.8%로 급증했다.

 서울시와 삼성생명이 함께 지난해 9월 마포대교를 ‘생명의 다리’로 재단장하면서 일부러 찾아오는 관광객들도 늘었다. ‘무슨 고민 있어?’ 등 다리 위에 적힌 메시지 외에도 생명의 전화 위에도 ‘넌 혼자가 아냐’ ‘힘내요 모두’ 등 응원 글귀가 쓰여 있다.

 육성필 QPR 자살예방연구소장은 “한국 사람들은 자살을 실패로 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쉽게 고민을 털어놓을 수 없다”며 “생명의 전화는 익명성이 보장되고 감정을 맘대로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황재욱 순천향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자살 시도자가 마지막으로 전화기를 뽑아 드는 순간에 전화를 받아주는 게 중요하다”며 “그걸로 약간의 시간을 버는 것이 한 생명을 살리는 시작”이라고 설명했다.

글=민경원·구혜진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이슈추적]
한강다리 위 생명의 전화 20대
자살 막는 상담사 동행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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