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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제자는 필자>|<제11화> 경성 제국 대학|강성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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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학기·학칙>
요릿집은 대개 한상에 5원부터 10원까지 받았는데 5, 6명은 충분히 먹을 수 있었다.
기생은 전속제가 아니고 권번이 있어 시간제였는데 대표적인 권번으로 한성·조선·종로 등이 있었다.
대개 손님들이 누구를 불러오라고 지명하는 것이 장례였으나 인기 있는 기생은 보통 1주일 이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차례가 오지 않았다.
화대는 첫 시간이 l원95전이었고 다음부터는 시간에 1원30전씩이었다.
그외에 인력거비 등 「팁」이 들기도 했다.
경성제대는 남녀 공학을 인정하지 않아 여자 졸업생은 1명도 내지 않았다.
당시 학년은 4월1일부터 3월31일까지였는데 법문학부는 4월1일∼10월15일을 1학기, 10월16일∼3월31일을 2학기로 하는 현재와 같은 2학기제를 택했으나 경학부는 4월1일∼8월31일, 9월1일∼12월31일, 1월1일∼3월31일등 3학기제를 실시했다.
방학은 1년에 세번으로 봄방학이 4월1일부터 4월10일까지, 여름방학은 가장 길어 7월l일부터 8월31일까지, 겨울방학은 12월25일부터 1월7일까지였다.
수업료는 1년에 1백원이었는데 이를 의학부 학기에 맞추어 35원, 35원, 30원 등 3회에 나누어 내게 되어 있었다.
화폐의 가치를 1대 1천으로 어림하면 1년 학비가 약 10만원이 되는 셈이다.
대체로 가정이 부유했으나 학비 조달이 어려웠던 학생도 가끔 있었다.
장학금은 대궐에서 주던 이왕직 장학금과 보인회 장학금이 있었다.
나와 박건원·박충집·안룡백씨 등이 받던 보인회 장학금은 웅본리평씨가 돈을 내어 설립한 것으로 동경에 본부가 있어 일본 대학을 포함, 매 학년 10명씩에게 장학금을 주었는데 경성제대학생에게는 2명씩 지급됐다.
많은 대학 가운데 2명씩 돌아온 것은 웅본씨가 한국에 와서 돈을 번 사람으로 한국의 장래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인재를 키우겠다는 보은의 뜻이 포함된 것이었다.
가정 교사·야간 강습소 교사·번역 등으로 학비를 조달하는 학생도 있었다.
12회 졸업생에는 법과에 김태영 (전 이대 법대학장·피납) 계창업 (변호사·세종 합동 법률 사무소 대표·전 대법원 판사) 홍진기 (중앙일보 사장) 홍순정 (전 제일 은행 상무) 차낙훈 (고대 교수) 조영구 (경성 방직 부사장) 정근영 (변호사·성균관대 교수) 전봉덕 (변호사) 이항령 (고대 교수) 문홍주 (전 문교부 장관) 박용선 (피납) 김석구 (미8군 근무)씨 등이 있었고 문과에 김석형 (사학자·재북), 의과에 공인호 (서울 의대 교수·개업·안과) 김인달 (서울대 보건 대학원장) 김철 (가톨릭 의대 교수) 남기용 (서울 의대 교수) 노경륙 (개업·내과), 이성호 (서울 의대 교수) 전병렬 (재「자메이카」) 한격부 (대한 의학 협회 회장·개업·욋과)씨 등이 있었다.
13회 졸업생에는 법과에 황산덕 (성균관대 법정대 학장) 박재섭 (고대 법대 학장) 김종규(전 부산 시장) 문작지 (한국 제일제약 감사) 선우종원 (변호사·중앙선관위원), 의과에 구필회 (개업) 방영헌 (개업·소앗과) 이동훈 (부산 의대 교수) 이영린 (개업) 이진성 (개업·냇과) 최한웅 (서울 의대 교수) 씨 등이 있었다.
13회 졸업생들은 예과가 3년으로 되면서 첫해에 입학한 학생들로 입학 자격이 5년제 고보 졸업자와 4년 수료자까지 확대됐기 때문에 수재들이 4년 수료 후 응시, 당당히 합격하는 등 비교적 우수한 사람이 많았다.
계창업씨의 기억을 빌어 12회 졸업생들의 재학중 면모를 알아보자.
김태영씨는 경성 제1고보를 수석으로 졸업, 재학 때 고시에 「패스」하고 부장 판사를 지낸 「대법원장 후보」라는 각광을 받다가 6·25때 아깝게 납치됐다.
문과의 김석형씨와 법과의 김석구씨는 2년 터울 진 형제였는데 형은 졸업 후 1년 쉬었고 동생은 경성 제2고보 (현 경복 중) 4년 수료 후 입학, 한해에 입학하게 됐다.
재주꾼으로 알려진 이항령씨는 소풍가는 날 학교에 늦게 나온 자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갔다고 소풍지까지 혼자와서 『나를 무시했다』면서 땅을 치며 운 일도 있었다 한다.
행정·사법 양과를 「패스」한 전봉덕씨는 경성 사범을 나와 만주에서 교편 생활을 하다가 예과에 입학, 나이는 약간 많았으나 노력가로 전체에서 수석 자리를 지켰고 2, 3년 전 법학 박사 학위를 받을 때의 논문이 옛과 때 교지에 실었던 「암행 어사」라는 논문을 약간 가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항령씨도 재학중 일본 문부성에서 모집한 논문에 당선되어 화제가 됐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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