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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제11화 경성제국대학(2)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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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보습과제도>
경성제대가 일본교육제도에 따른 신교육령에 의해 설립됐기 때문에 구교육령에 따른 학제로 교육을 받은 한국학생들은 입학자격문제를 둘러싸고 큰 진통을 겪었다.
고등보통학교까지 8년 과정을 이수한 마지막 졸업생인 우리동기생들은 5년제 중학교까지11년 과정을 이수한 일인학생과 같은 입학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2년제 보습과를 거쳐야했다.
이 보습과는 조선총독부가 경성제대설립에 앞서 제도적인 「갭」을 메우기 위해 마련한 임시교육제도로 경성제대설립방침을 발표한 1921년 봄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중·고교)에 개설, 일본중학교 3, 4, 5학년에 해당되는 교육과정을 교육토록 하여 제대 예과를 비롯, 정규 일본대학에 응시자격을 준 이른바 자격부여기관이었다.
보습과는 1922년부터 고등보통학교가 5년제로 개편되어 제대예과 입학자격을 주기 시작함으로써 단1회의 졸업생만 내고 없어져 버렸다.
3년 과정을 2년에 이수해야했기 때문에 선발고사가 있어 60여명의 응시자가운데 31명이 합격했다.
보습과 입시에는 내가 다니던 경성고등보통학교를 비롯, 서울의 휘문·양정, 그리고 평양·성흥고보 등 5개 학교 졸업생들이 모여들었다.
당시에는 보통학교는 물론 고등보통학교도 일본말교육에 치중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다른 과목의 실력이 비교적 낮았고 특히 수의과목인 영어실력은 고보를 졸업했다해도 요즘·중학교 2학년생 정도의 수준이었다. 총독부는 일본중학교에서도 유능한 교사를 데려다 선두 「그룹」을 형성한 학생을 기준으로 급행교육을 했고 이 결과 31명의 입학생가운데 19명이 중도 탈락하고 12명만이 수료증을 받았다.
보습과 과목은 입시에 직결된 영어·일어·역사·지리· 물리·화학 등에 국한됐다.
우리가 보습과를 나온 23년에 개교예정이던 경성제대가 예산관계로 1년 늦는 바람에 이해에 5년제 고등보통학교를 1차로 졸업한 김성진군, 2차 졸업생인 유진오군 등 경성고등보통학교 3개년간 졸업생이 예과 동기생이 되었다.
이밖에 중학교졸업자격검정고시 제도를 통해 예과에 입학한 학생도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정규중학교가 아니던 중동학교를 거친 학생들로 중동학교는 당시로는 가장 많은 3천여명의 학생이 있었다.
이들은 완고한 부모 때문에 나이 먹을 때까지 학교공부를 못하다가 개화의 물결과 함께 서당을 뛰쳐나온 학생들이 대부분이어서 나이도 대체로 많았고 처자를 가진 이도 많았으나 공부를 하겠다는 자각과 열의로우수한 성적을 내는 이가 많았다.
이런 의미로 보아 중동학교가 우리나라교육에 끼친 영향은 어느 다른 학교보다 못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보습과 동기생들은 개교가 1년 늦어지는 바람에 12명 가운데 인태식(전 재무부장관) 정홍섭군 (전 국회사무총장·고인)등 8명은 일본고등학교 또는 사립대학 예과에도 유학했고 이우정군(전북도교육위원) 등 3명은 경성고상에 입학했다.
학비조달이 어려웠던 나는 연만하신 부모님이 고상으로 가라고 권했으나 교직에 계시던 형님이 일본유학은 보내지 못하지만 경성제대에는 입학해야될 것이 아니냐고 격려, 몇 차례의 가족회의 끝에 1년 동안 재수생들을, 수용하는 보습과(앞의 보습과와는 다름)에서 공부했다.
이곳에는 역시 개교를 기다려 1년간 쉬게된 김성진·김계숙군(전 서울대대학원장·함흥고보졸) 등이 함께 있었다.
당시 일본의 조대·경응대·명치대·중앙대 등 사립대학은 각기 예과를 가지고 있었으나 제국대학은 부속 예과가 없고 동경에 일고, 선대에 자고, 경도의 삼고 등 20여 개의 3년제 고등학교가 있어 이곳을 졸업한 학생들에게만 응시자격을 주었다.
경성제대만은 지역적인 특수성 때문에 사립대학과 마찬가지로 예과 제도를 두고 일본고등학교와 같은 자격을 주었다.
동경·경도제대는·법학부와 문학부가 분리되어 있었으나 경성제대는 구주제대를 본떠 법문학부로 출발했다.
이것은 법률만 공부한 사람이 너무 딱딱해지는 것과 문학을 하는 사람이 기초적인 법률상식조차 모르는 것을 염려하여 전공이 아닌 과목을 몇 개씩 듣게하여 조화된 인격을 갖추려는데 목적이 있던 것 같다.
법대학부는 법률과·정치학과·철학과·사학과·문학과 등 5개학과로 구성됐다가 27년부터 법률과와 정치학과가 법학과로 통합됐다.
학부에는 정규입학생 외에 선과생과 청강생이 있었는데 선과생은 학과단위로 지망, 성적이 좋으면 본과학생과 같이 학사자격을 얻을 수 있었고 청강생은 과목단위로 신청, 1개 과목에 연간15원(1만원정도)을 내고 배웠으나 자격은 얻을 수 없었다.
선과생으로 들어와 학사자격을 얻은 우수한 졸업생으로는 박종홍씨(한양대대학원장) 등 20여명의 한국인이 있었으며 청강생으로는 당시 문명을 날리기 시작했고 동아일보편집국장이던 춘원 이광수씨가 좌등청교수의 영문학강의를 들은 것으로 기억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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