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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덜너덜 낡은 책에서 건진 선비문화 … 과거 예상문제집도 손수 만들었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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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논어』 일부. 밑줄을 긋고 다른 종이로 덧댄 흔적이 남아있다. [사진 글항아리]

“어느 분이 고서를 대량으로 기증했는데 아무도 안 가져 가네요. 혹시 필요하신가요?”

 한국학 연구모임 ‘문헌과해석’의 장유승(37·단국대 동양학연구원)씨는 4년 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고서라면 자다가도 일어날 선배들이 마다했다니 짐작은 갔지만 혹시 몰라 먼지 풀풀 나는 고서 100여 권을 집에 가져왔다. 뜯어보니 역시나 ‘섭치(변변치 않고 너절한 물건을 일컫는 순우리말)’였다. ‘TV쇼 진품명품’에 가져가면 0원의 굴욕을 당할, 종로 민속주점에서 벽지로 쓰일만한 쓰레기 고서였던 것이다.

 한문학을 연구하는 장씨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모두 가치가 없다고 하니 왠지 모를 반감이 생겼다. 희귀하지도 않고 이제 갓 100년을 넘겼으며 상태도 불량한 책들이 그저 우리네 보통사람처럼 느껴졌다. 왕조실록이나 의궤 같은 귀중서도 중요하지만 시대의 ‘베스트셀러’도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장유승

 그가 주목한 목록은 과거시험 준비생들의 필독서인 『백미고사』, 집집마다 보유하던 풍수지리서 『옥룡자답산가』, 실용의학서 『의학입문』 등이다. 요즘으로 치면 옆집 수험생이 밑줄 치며 공부한 『수학의 정석』을 100년 후 고서 연구가가 연구하는 격이다. 장씨는 이를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글항아리) 이라는 책으로 묶어냈다.

 파면 팔수록 이야기가 쏟아졌다. 특히 손수 만든 과거시험 예상 문제집 ‘과시(科詩)’는 그 다양성 면에서 흥미로웠다.

 “옛날 책은 찍어내기보다 베껴 쓰는 경우가 많았어요. ‘과시’는 출제경향에 따라 문제가 계속 바뀌면서 변모해나가더군요. 소설도 필사하는 사람에 따라 이야기가 바뀌는 모습이 보이거든요. 당시 독자들은 적극적으로 제작과 편집에 참여한 셈이죠.”

 종이가 귀했던 만큼 아끼기 위한 노력도 대단했다.

 “가난한 선비들의 책은 여백도 거의 없고, 크기도 작았어요. 폐지를 재활용해 너덜너덜한 표지를 두텁게 배접(褙接)하기도 했는데 공부에 대한 열의가 눈물겹더라고요.”

 책 주인이 사이사이에 끼어놓은 영수증·편지·부적 등은 덤이었다. 귀퉁이에 적은 메모를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예컨대 가난한 과거 준비생 박구남씨의 책에서 ‘아내를 얻는 데 중매가 없다고 한탄하지 마라/책 속에 옥 같은 용모의 여인이 있으니’라는 글을 발견하는 식이다.

 “과거시험에 수십만 명이 몰리던 시대였어요. 신분질서가 흔들리면서 신분상승의 욕구가 컸죠. 책을 살펴볼수록 예나 지금이 다르지 않다고 느낍니다. 땅 살 때 풍수지리를 따지고, SNS에 일상을 기록하듯 시도 때도 없이 일기를 남겼죠.”

 보통 사람들 이야기인 만큼 책은 구어체 존대말로 쓰였다. 유머 넘치는 필치도 눈에 띈다. 이제 쓰레기 고서들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걸까. “각 분야 전문연구자들에게 나눠줄 생각이에요. 받을진 모르겠지만요.”(웃음)

김효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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