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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천관산 억새 산행 vs 화왕산 억새 산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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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는 지금부터 한 달 동안 가장 아름답고 환한 빛을 낸다. 햇빛을 맞아 은색 물결로 물든 전남 장흥 천관산 억새 평원.

어느새 가을이 완연하다. 바람은 선선하고 하늘은 청명하다. 곱게 멋을 낸 산은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는 듯하다. 도무지 달뜨는 마음 막을 길 없다.

가을 나들이라 하면 십중팔구 단풍놀이부터 떠올린다. 누가 뭐래도 가을 산의 주인공은 단풍일 터이다. 설악산부터 곱게 물들기 시작한 단풍은 어느새 속리산·가야산까지 내려왔다. 조만간 전국의 산과 계곡이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결칠 참이다.

억새도 가을 산의 주인공이다. 단풍 산이 화려한 빛깔로 단번에 시선을 빼앗는 불꽃놀이라면, 억새 산은 밤하늘에 촘촘히 박혀 은은하게 빛을 내는 은하수다. 단풍처럼 야단법석 떨며 피지는 않지만 단풍보다 이른 9월부터 이듬해 초까지 묵묵히 산을 장식한다.

무엇보다 억새는 가을 꽃이다. 가을 햇살 아래서 반짝이는 건 억새 중에서도 꽃이다. 단풍은 빛바랜 잎사귀지만, 억새는 만발한 꽃이다. 하여 억새 산행은 가을에 떠나는 꽃놀이다.

억새는 보통 9월 말께 자주색 꽃을 피워 시간이 흐르면서 갈색으로, 다시 은색으로, 나중에는 흰색으로 변한다. 하루에도 여러 번 억새 꽃은 다른 빛깔로 반짝인다. 해가 뜨고 질 때는 황금색으로 반짝이고 한낮에는 하얀 솜털 모양 나부낀다. 하여 억새는 온종일 봐도 질리지 않는다.

억새는 꽃을 피운 지 한 달쯤 지나면 만개해 보드라운 흰머리를 휘날리며 출렁인다. 이맘때쯤인 10월 중순부터 11월 초까지가 가장 아름다운 시기이다. 이때에 맞춰 억새 축제가 열린다. 서울 상암동 하늘공원(10월 18~27일)에서도, 경기도 포천 명성산(10월 9~27일)에서도, 강원도 정선 민둥산(9월 27~11월3일)에서도 억새꽃 축제가 이어진다.

“11월 초순 찬바람이 불면 수정이 끝난 억새 씨들이 바람을 따라 날아다니기 시작해요. 마치 하얀 솜털이 날리는 것 같아 아름답기 그지없죠.” 창녕 화왕산에서 만난 오종식(53)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이다.

억새는 종종 갈대와 쌍둥이 취급을 받지만 완전히 다른 식물이다. 갈대는 물가에서만 자라지만 억새는 물기가 없는 뭍에서도, 산등성이에서도 잘 자란다. 억새를 보려면 산행을 감수해야 하는 까닭이다. 꽃 모양도 다르다. 줄기에 꽃이 수북하게 매달리는 갈대에 비하면 억새는 수술의 양이 적다. 빛과 잘 어울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수술이 적당한 억새는 빛을 받으면 그늘 대신 화려한 빛깔을 내어 놓는다.

올가을 week&은 단풍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억새 산부터 찾았다. 전국에는 내로라하는 억새 산이 많지만, 올해는 호남과 영남에서 한 곳씩을 골랐다. 호남에서는 전남 장흥의 천관산(723m)을 올랐고, 영남에서는 경남 창녕의 화왕산(757m)을 올랐다. 두 산 모두 지역은 물론이고 나라를 대표하는 가을 풍경을 연출하는 명소다. 이른바 억새 산 비교 체험이다.

1 천관산 정상의 억새 평원. 다도해의 그림 같은 풍광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40만 평 억새나라 전남 장흥 천관산

전남 장흥 천관산(723m)은 이맘때 가장 아름답다. 성질 급한 억새는 단풍이 찾아오기 전 벌써 하얗게 피어 출렁이고, 제 몸끼리 부대끼며 서걱서걱 소리 내어 사람들을 부르고 있었다. 다도해 일출과 겹치니 억새는 꽃이자, 황금이었다.

2 환희대와 구룡봉 사이에서 바라본 진죽봉. 천관산은 기암괴석이 많기로 유명하다.
3 아주 맑은 날에는 천관산 정상에서 다도해 너머로 제주도 한라산이 선명히 보인다.
4 천관산 연대봉에 있는 봉수대.

기암괴석과 조화 … 다음달 초까지 절정

구름 위의 산책. 천관산 정상에서 이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산 정상 억새 능선의 광활한 자태는 멀리서 보면 평온한 바다 같고, 한복판을 누빌 때는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이다. 억새밭만 무려 130만㎡(약 40만 평)에 이른다.

천관산 억새는 10월 초부터 11월 초까지 약 한 달간 절정이다. 올해는 태풍도 피해간 덕에 억새꽃이 더욱 촘촘히 보기 좋게 피었다.

지리산(1915m)·내장산(763m)·월출산(809m)·내변산(510m)과 함께 호남의 5대 명산에 꼽히는 천관산은 워낙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억새도 억새지만 장대한 기암괴석들이 산 곳곳을 지키고 있어 사계절 언제 올라도 지루할 틈이 없다.

멀리로는 월출산·무등산 등 명산이 반기고, 아주 맑은 날엔 제주도 한라산까지 시야에 잡힌다. 본래 천관산은 조선시대 한라산의 봉화를 뭍으로 연결하던 곳이기도 하다. 최정상인 연대봉에는 봉수대가 복원돼 있다. 정상에서 보이는 다도해도 한 편의 그림. 봉수대에 오를 것도 없이 천관산 곳곳에서 다도해를 즐길 수 있다.

천관산을 오르는 방법은 10가지가 넘는다. 가장 빠른 방법은 대덕읍 방면 탑산사 주차장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탑산사~구룡봉~환희대~닭봉~연대봉(2.8㎞)에 이르는 데 1시간20분이면 충분하다. 하나 보통은 관산읍 방면에서 장천재를 기점으로 오르는 쪽을 택한다. 천관산이 자랑하는 기암괴석과 다도해를 두루 만끽하며 오를 수 있어 시간은 오래 걸려도 눈은 더 즐겁다. 장천재~체육공원~환희대(구룡봉)~닭봉~연대봉(3.6㎞) 코스로 정상까지 2시간30분 남짓 걸린다. 천관산은 산세는 험하지 않아도 크고 모난 돌들이 많아 등산화를 챙기는 게 좋다.

5 육중한 바위를 포개놓은 듯한 모습이 이색적인 천관산 아육왕탑.

환희대와 연대봉 사이 능선(1㎞)은 걷는 길과 바위 빼곤 모두 억새다.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어렵다. 빛을 좋아하는 억새에 최고의 환경인 셈이다. 반면 천관산을 찾은 등산객에겐 곤욕이자, 즐거움이다. 나무가 없어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기 때문이다. 고통도 잠시, 억새밭에 시선을 두면 금세 위안이 된다. 바람에 서걱거리며 일렁이는 억새 바다의 풍경은 그 너머 다도해와 겹쳐지며 환상의 조화를 만들어낸다.

천관산은 그리 높지 않아 모두 누비는 데 5시간이면 충분하다. 다만 억새의 진정한 멋을 보려면 이른 새벽부터 산에 오르는 수고를 각오해야 한다. 다도해 너머로 해가 떠오르며 억새밭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광경은 이때만 볼 수 있다. 해가 섬과 구름 사이를 오가며 중천에 오르기까지 억새도 다도해도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하여 천관산에 오를 때는 카메라가 필수다. 한자리에서만 셔터를 눌러도 시간에 따라 다른 맛의 사진을 건질 수 있다. 가장 좋은 사진 포인트는 환희대와 닭봉이다. 억새로 물든 연대봉이 그 뒤로 펼쳐진 다도해와 만나 알아서 그림을 만들어내니, 그야말로 완벽한 피사체가 따로 없다.

●여행정보=서울시청에서 자동차를 이용하면 장흥까지 5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서울센트럴시티터미널에서 장흥 회진시외버스터미널을 오가는 버스도 있다. 터미널에서 천관산까지는 택시를 이용해야 하는데 기본요금으로 닿을 수 있다. 천관산 정상까지 오르는 방법은 10가지도 넘지만 장천재와 탑산사를 기점으로 삼는 게 보통이다. 넉넉히 5시간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인근 억불산(274m) 자락에 편백나무 빼곡한 편백숲 우드랜드(061-864-0063)가 있다. 매주 토요일 장이 서는 토요시장(061-864-7002)에 가면 장흥 한우를 맛볼 수 있다. travel.jangheung.go.kr, 061-867-7075(천관산도립공원관리사무소).

영남 대표 억새나라 경남 창녕 화왕산

경남 창녕 화왕산(757m)은 영남 알프스와 함께 영남 지역을 대표하는 억새 산이다. 옴팍한 분화구에 하얀 물결 넘실대는 억새밭은 단풍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안겨준다. 그리 높지도 않고, 억새평원까지 임도가 연결돼 있어 쉬이 올라갈 수 있다.

6 바람에 몸을 맡긴 화왕산 하얀 억새가 넘실넘실 춤을 추고 있다. 저 멀리 보이는 성곽이 화왕산성이다.

장금이가 걷던 성벽에 서면 눈앞이 황홀

‘이 환장하게 환한 가을날 화왕산 억새들은 / 환한 중에도 환한 소리로 서걱대고 있으리.’(황동규, ‘이 환장하게 환한 가을날’ 부분)

아마도 황동규 시인은 이맘때 화왕산을 올랐나 보다. 시인의 말마따나 화왕산 억새는 이맘때 가장 환하다. 작은 솜사탕 마냥 꽃대마다 하얀 꽃을 활짝 피운 억새는 이달 20일쯤부터 한 달간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가장 환히 빛난다.

화왕산은 모양새가 독특하다. 보통 억새산은 산 정상부가 밋밋하거나 약간 볼록하다. 그러나 화왕산은 옴팍하다. 화산 폭발로 인해 산 정상부에 분화구가 생겨서다. 덕분에 화왕산에 오르면 어느 곳에서나 24만㎡의 억새평원 전체를 볼 수 있다.

등산객은 보통 임도를 따라 오르는 옥천매표소 길을 택한다. 두 시간 남짓 걸으면 육중한 성곽이 길을 막는다. 화왕산성이다. 산성 동문을 통과하면 화왕산 억새밭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성을 따라 등산로가 잘 다듬어져 있다. 오른쪽으로 돌아 화왕산 정상으로 가도 되고, 왼쪽으로 올라가서 배바위~서문으로 가도 된다. 산성을 한 바퀴 도는 길은 약 2.5㎞로 한 시간이면 족하다. 힘에 부치는 등산객은 동문과 서문을 곧장 잇는 야자수 매트 길만 걸어도 된다. 400m 정도 쉬엄쉬엄 걸으며 올라도 10분이면 된다.

7 화왕산성안에 있는 연못인 용지.
8 화왕산성 동문에서 바라본 억새 평원.

배바위 쪽으로 발길을 옮겨 드라마 ‘대장금’에서 장금이(이영애)가 민종사관(지진희)을 따라 걷던 화왕산성 성벽 위에 올랐다. 시원한 가을 바람의 운율에 맞춰 이리저리 고개를 흔드는 억새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에서 드라마를 촬영한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산성 성벽 주면은 화왕산에서 힘들이지 않고도 억새 전경을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였다.

성벽에서 내려와 억새밭 사이로 난 길로 접어드니 곧바로 오르막이 이어졌다. 억새가 지천으로 피어 있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억새는 산억새와 물억새가 있습니다. 산억새는 마디가 길고 대가 굵어서 남성적이라면, 물억새는 짧고 가늘어 하늘하늘 흔들려 여성적이죠.” 오종식(53) 문화관광 해설사의 설명이다. 게다가 산억새는 잎의 양끝이 칼날 같아서 맨손으로 잡았다가는 베일 수도 있다고 한다.

10여 분 만에 배바위에 도착했다. 배바위에는 아픈 기억이 서려 있었다. 2009년 화왕산 억새를 태우다 사고가 났을 때, 관광객들이 불길을 피해 이 배바위 밑으로 뛰어내렸다고 한다. 배바위 위에 오르니 억새평원 전체를 내려다보였다. 왜 이 바위에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서문까지는 내리막길이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고 한달음에 내려왔다. 그러나 서문에서 화왕산 정상까지 이어진 2.5㎞ 구간에 가장 힘든 오르막길이 숨어 있었다. 200m 남짓한 오르막길이었지만, 한두 번 긴 숨을 토해내야 했다. 정상에 오르니 창녕읍을 지나 저 멀리 우포늪도 한눈에 들어왔다. 북쪽으로는 대구의 비슬산이 창녕을 감싸안은 듯했고, 서쪽으로는 창녕을 휘감으며 흐르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여행정보=경남 창녕까지는 서울시청에서 자동차로 4시간 정도 걸린다. 등산은 두 방면에서 할 수 있다. 자하곡 매표소~화왕산성 서문 코스는 3㎞ 길이지만 계곡과 바위등이 있어 다소 힘들다. 산행 시간 약 한 시간 반. 옥천매표소~화왕산성 동문 코스는 임도를 따라 오르는 길이어서 그리 힘들지 않다. 5.2㎞로 두 시간 남짓 걸린다. 각각 입장료 1000원(어른), 주차비 2000원. 창녕에는 람사르협약 등록습지인 우포늪이 있다. 창녕읍에서 20분이면 닿는다. 억새 산행 뒤에는 부곡온천에서 피로를 풀라고 권한다. 화왕산에서 30분 거리다. tour.cng.go.kr, 055-530-1999(창녕관광안내소).

글=이석희·백종현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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