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진우의 저구마을 편지] 천하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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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 마을의 급수 체계는 뒷산 계곡물을 송수관으로 연결해 물탱크에 잠시 저장했다가 각 집으로 내보내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수도꼭지에서 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송수관 어딘가가 어설프게 막혀 수압이 낮아지면서 가정용 물탱크에까지 물이 들어가지 않나 봅니다. 송수관을 따라 오면서 점검해 봐야 막힌 곳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일에도 요령이 있어서 칠순을 넘긴 이장님 뒤를 따라 다녀야 합니다. 요즘 이장님이 막내아들 혼사 때문에 여가가 없는 모양입니다. 물을 많이 쓰는 몇몇 집에서 불평을 터뜨리기도 하였습니다만 대부분은 태연합니다.

혼자 사는 꼬부랑 할머니가 지나가시기에, 물 때문에 고생하지는 않는지 여쭸습니다. 할머니는 웃으시면서, "내사 하루에 물 한 바가지모 쓰고 남는다" 하십니다. 밥 그릇 하나 반찬 그릇 하나로 사는 살림이라 따로 설거지 할 일도 없고 재래식 화장실을 쓰니 밥 끓일 물 한 바가지면 충분할 겁니다. 못 살아서가 아닙니다. 절약이 몸에 배어 있어 그리 사십니다. 욕심이 없으시니 몸도 마음도 태평하신 게지요. 할머니, 꼬부라진 허리에 뒷짐을 지고 훠이훠이 쑥 캐러 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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