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남덕현의 귀촌일기

여그가 삼백 년 묵은 터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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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남덕현

“남 서방, 여가(여기가) 우덜 조상님덜 삼백 년 묵은 터전이여! 그런 줄만 알구 집 짓구 살어 잉?”

 첫 삽을 뜨던 순간, 장인어른이 하신 말씀이다. 당시에는 그 뜻을 미처 새겨듣지 못했다. 이제 시작이라는 흥분, 빠듯한 예산 걱정,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비장함이 더해져 묘한 감상에 젖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잇따라 터지는 예상치 못했던 사건 앞에 필자는 속수무책이었다. 시작은 지하수였다. 지하수를 퍼 올려야 한다는 것만 알았지, 수맥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는 생각조차 못했다. 수맥을 짚던 업자가 겨우 찾아낸 자리는, 안방이 들어설 자리였다. 물이 흔한 동네라 지천에서 지하수가 솟는다는 말만 믿고, 미리 업자를 불러 알아볼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안방 한가운데 지하수를 퍼 올리는 모터를 모시고 살든지, 아니면 집자리를 옮기든지 양자택일하라는 최후통첩이 내려졌다. ‘ㄷ’자로 설계했던 집을 ‘일(一)’자로 고쳐야만 했고, 집 모양은 영 볼품없어지고 말았다. 너무 더워서 보름, 장마와 태풍으로 보름, 그렇게 한 달을 까먹는 바람에 도시에서 내려온 이삿짐은 마을회관과 비닐하우스로 들어가야만 했다.

 파란만장했지만 그중 으뜸은 단연 불법 건축물 철거 문제였다. 한 필지 안에 불법 건축물이 있는 경우에는 준공 허가가 안 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무엇이 불법 건축물에 해당하는지는 몰랐다. 장인어른이 사시는 집 절반이 불법 건축물인 셈이었다. 창고, 테라스 지붕, 가마솥 위 지붕까지도 철거 대상이었다.

 “그런 식이믄 시골집덜은 맬깡(모두) 뜯으야 쓰는디? 암말두 읎다가 인자와서 몽창 뜯으라구 허믄 당최 사램이 워찌케 산댜?” 필자가 집 짓는다고 나서지 않았다면 몰라도, 신축 공사를 하려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신 집이 뜯겨 나가는 동안, 필자의 새집을 멍하니 바라보시던 장인어른 앞에서 얼마나 민망했던지. 장인어른이 괘념치 말라는 듯, 필자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니 돈 내구 니 집 짓는디 맴(마음)대루 되는 게 한 가지두 읎지? 여그가 삼백 년 묵은 터여!”

 비로소 ‘삼백 년’ 묵은 터의 의미를 새겨 보았다. 삼백 년의 우주적 시간 앞에 내 돈, 내 집이 어디 있단 말인가. 주어진 대로 흔적도 없이 잘 살다 가겠습니다, 하는 심정으로 공사를 시작했더라면 마음고생을 크게 덜었을 것이다. 장인어른 말씀대로 그런 줄만 알고 살면 좋았을 것을 . 삶은 그렇게 영원히 헛도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남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