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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학도 의용병(11)|정훈대대|「6·25」20주…3천명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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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전회에 이어 정훈대대의 활동 상을 대원들로부터 더듬어 보겠다. 원래 이 부대는 이북에서의 정훈선무를 목적으로 편성됐지만 정세의 변동으로 남한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대부분이 학생인 이 부대원들은 군번과 계급 없이 2년 동안 복무하다가 해산 복교했다.
이렇게 실제로 현역군인과 다름없는 군복무를 했는데도 이들이 복교한 후 당국에서 병적 처리를 소홀히 하여 병역기피자란 억울한 누명을 쓴 경우도 있었다. 58년에 가서야 정훈대대 복무자도 「병역필」로 간주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이때는 또 실제로 정훈대에 근무한 적도 없는 병역 미필자들이 이 기회를 악용하였다.
이런 가짜 정훈대대 병역필자는 현재도 사회 저명 인사속에 그대로 끼여있다는 것이다.

<윤천주 대원은 포로 돼>
▲홍봉선씨(당시 동국대 재학=773부대원·현 한전 남부지점 근무·41)『12월30일에 우리중대는 대구로 내려가서 자체 훈련을 하고 있다가 소대 단위로 각 지방에 파견 나갔어요. 현역장교 3명에 대원 9명이 한 조가 돼서 공비와 좌익분자가 많았던 지역으로 파견돼 나갔지요. 나는 청송으로 가서, 경찰과 함께 공비를 토벌했어요. 이때 10여 명의 적을 사살했는데 우리 부대도 가끔 공비의 습격을 받았어요. 그 후 정훈대를 삼보에 집결시키더니 전방 각 사단으로 배치하더군요.
나는 7사단 5연대에 배속되어 양 갈래 고지전투에 참가했어요. 이때 고지를 빼앗은 뒤「마이크」를 장치하고 대적방송을 하다 적의 집중사격으로 「스피커」가 산산조각이 났어요.
나 자신도 박격포탄 파편으로 다리에 부상을 입었고요. 정신없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밥을 나르는 노무자들이 보고 업어다 주어 살아났습니다. 그 길로 대구 27육군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은 다음 대전으로 갔죠. 전라도 광양 파견대에 배치돼 근무하다가 하루는 여기서도 공비의 습격을 받았어요. 이 전투 때 김희균 대원이 공비의 수류탄에 맞아 전사했어요. 제천에 있을 때는 대구 본부로 연락하러 가다가 의성 고개에서 공비의 습격으로 2명의 대원이 전사하고 윤천주(서울 상대생) 대원이 포로가 됐고요. 정훈대대는 52년9월에 대전에서 해체됐는데 병역문제는 후에 이영치 장군이 주선해서 제대증을 받았습니다.』
▲안명식씨(당시 성남중 재학=773부대원· 현 송원영의원 비서관·40)『나는 773부대 1중대대원으로 경남 하동군 악양면에 파견돼 나갔습니다. 가보니까 공비들의 준동이 어찌나 심한지 면사무소 간판이 앞면은 「악양 면사무소」이고, 뒷면은「악양면 인민위원회」로 돼있어요. 그러니까 낮에는 면사무소 간판을 달고 밤에 공비들이 내려오면 뒤집어 다는 거지요. 우리는 면사무소에서 기식하면서 민심수습에 나섰습니다.
우선 이장들을 모아놓고 교육을 시키는 한편 호별방문도 하면서 반공계몽을 했지요. 이렇게 몇달 선무공작을 하니까 꽤 성과를 얻었어요.
51년5월에는 1사단 12연대에 배속돼서 일선 장병들의 정훈교육을 맡았어요.

<주민들에 생명 안전증>
백선엽 전투사령부에 가서는 운봉산 지구 파견대에서 일했습니다. 산간부락에 들어가서는 「생명안전증」을 발급해 주면서 공비들의 귀순공작을 했어요. 낮에 우리가 가서 선무활동을 하고 오면 공비들이 어떻게 아는지 우리가 다녀간 그 집을 밤에 습격해요. 그래서 우리가 아주 밤에도 그 집에 머물러 있으면 그날 밤은 안 나타납디다. 생포한 공비들도 심문했는데 우선 애국가를 부르게 하면 대개가 부르고 나선 울어요. 그리고는 속이 후련한지 모든 일을 순순히 털어놓더군요 ▲주광인씨(당시 한양공대 재학=772부대원·현 대한삼공 전기주식회사사장·43)『우리는「징집된 민간인」이라고 적혀있는「정훈원」이란 신분증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어요.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이 신분증에 불만을 품고 찢어 버리기도 했어요. 우리 대는 호남지방의 공비귀순 공작을 벌여 순창 같은 데에서는 상당수의 공비를 귀순 시켰습니다. 이때 우리 대원은 무기도 가지지 않고「마이크」만 가지고 산 속으로 들어가 귀순권유방송을 했어요. 부대가 남원으로 이동할 때 나는 휴가를 얻어 부산에 갔어요. 가보니까 친구들은 모두 학교에 다니고 있습디다. 2년 이상이나 군대에 있었으니까 이젠 공부를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부대엔 안 돌아가고 학교에 나갔지요.
그 뒤 나는 병역문제로 여간 고통을 받은 게 아니예요. 가두 검문 때마다 병역기피자라고 붙잡는 거예요. 정훈대대에서 싸웠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믿지를 않아요.
마침 나는 정훈대대에 있을 때 박격포 파편으로 다리에 부상을 입고 1년 이상 고생을 했어요. 그래서 검문에 걸릴 때마다 부상한 상처를 보이며 참전했다고 해서 겨우 안 끌려 갔습니다.

<주민들에 선전문 돌리고>
▲장봉석씨 (당시 홍익대 재학=773부대원·현 「코리어·헤럴드」사무국장·42) 『1·4후퇴로 대구에 내려가니까 이선근 정훈국장이 우리 5중대를 전투 부대 안 정훈교육에 시범 투입합디다. 이래서 5중대는 수도 사단으로 가서 각 연대에 배치됐어요.
나는 한신 대령이 연대장인 1연대에 배치돼 참호 속에서 사병과 함께 행동했지요. 이때 전선에는 적이 부산에 상륙한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어요. 우리 정훈 대원들은 민심 수습을 위해 「비라」를 인쇄해서 뿌리고 전주에다 붙이기도 했어요. 강릉에서 다시 9사단에 배속돼 사병들의 정훈 교육을 맡았고 매봉산 작전 때에는 일선 소대전투 요원으로 나가기도 했죠. 매봉산을 점령하고 보니까 적은 바위에다 호를 파 놓았습디다.
이때 우리는 무용담을 수집해서 신문사에 제공, 보도케 했지요. 매봉산 전투 뒤 3군단이 포위됐을 때 김유순 대원은 적에 잡혔다가 탈출해 나왔어요.
백선엽 전투사령부로 가서는 「라디오」를 청취, 「프린트」해서 민간인들에게 돌리기도 했고요. 김희균 대원이 토벌작전에서 전사했는데 뒤에 서정입 중대장이 중심이 돼 성금을 모아 김대원 고향에 추모비를 세워줬지요.
남성민(현 코리어·헤럴드 정경부 차장)대원은 금화지구 603고지 참호 속에서 정훈활동을 하다가 다리에 부상을 입고 후에 화랑훈장을 받았지요.』
▲백동현씨(당시 연대 재학=773부대원·현 반공 연맹 홍보부장·40)『9·28 수복 후 남원에 11사단이 들어와 전주에 정훈부를 두었어요. 임방현씨와 박권상씨 등이 중심이 된 학생들이 11사단 정훈부에 나가 대적 선무활동을 했어요. 나도 처음에 여기에 들어가 일을 거들다 진안에 주둔한 13연대를 따라갔어요. 이 연대가 덕유산 공비토벌을 할 때 50여명의 학생들도 참전했어요. 휴가로 집에 와보니 773부대가 전주에 파견대를 설치하고 활동합디다. 대원들이 모두 학생이어서 나도 이 부대에 들어가서 근무했죠. 얼마 있으니까 은종관씨가 학도 의용대를 조직한다고 해서 함께 일했죠. 각 도에까지 파견대를 두었는데 고창군 파견대가 제일 활약이 커서 모범으로 선정됐어요.』

<일부학생들 좌익에 사형>
▲양회수씨(당시 서울대 재학=학도 의용대원·현 국회의원·48)『6·25때 시골고향에 가있었는데 그자들은 내가 지주의 아들이라고 해서 반동으로 몰더군요. 보리밭에서 한 달쯤 숨어 지내다 내무서원에게 잡혔어요. 모진 고문을 당하고 유치장에 갇혔다가 도망쳐 나와 피해 다니다가 9·28 수복을 맞았어요. 이때 중앙에서 학도 의용대 전남 지부장으로 박충훈씨 (현 체신부 서기관)가 몇 명의 요원을 데리고 내려왔어요. 모두 군복을 입고 학병「마크」를 달고 있더군요.
박씨는 내 후배인데 나더러 전남 부지부장을 맡아 달라고 합디다. 나도 공산당 타도를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하려던 참이어서 즉석에서 수락했지요.
우리 대원들은 군경과 합동해서 숨은 좌익분자를 색출하고 잔비 토벌에도 협조했습니다. 또 각 학교를 찾아다니며 간단한 군사훈련도 시키고 사진 전람회를 열어 반공의식을 고취 시켰습니다. 학생들에 대한 정훈교육을 담당한 셈이지요.
그리고 이때는 혈기왕성한 일부 학생들이 좌익분자 가족들에게 무자비한 보복과 사형을 가한 예가 더러 있었어요. 우리 대원들은 이런 학생들을 타일러 부역자는 법의 심판을 받게 하도록 했어요. 알다시피 전 남북에서 공산당의 양민학살이 가장 많았으니까…. 9·28뒤 이편의 보복이 뒤따른 것은 당연하다고 보겠지요.
그러나 감정에만 치우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우리 의용대가 9·28수복 뒤 격한 민심을 진정시키는데 많은 역할을 했어요. 각 군마다 지대를 조직하여 각급 학교의 질서도 바로 잡고요.
이때 소요되는 경비는 모두가 대원 각자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썼습니다. 순수한 애국심으로 모두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들 일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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