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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도선사 유항렬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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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도선사는 유항렬(1900∼71·사진)이다. 충남 공주 출신으로 1925년 도쿄상선학교를 졸업했다. 일본 상선회사에 들어가 일본에서 유럽과 북미를 오가는 상선에서 2등 항해사로 일하다 1930년 귀국한다. 그 후 인천 ~ 중국 상하이(上海) 항로를 오가는 기선인 2000t급 헤이안마루(平安丸)호 등의 선장으로 일했다.

 그는 1937년 일본인들의 견제를 극복하고 조선인 최초로 도선사 면허를 받은 뒤 인천항에서 도선사 활동을 시작한다. 도선사의 독점권을 인정한 도선관련법은 일제가 1915년 9월 공포한 조선수선령이다. 일제가 일본인 도선사들에게만 특혜를 주기 위해 제정한 법이다. 자신들이 특권을 누려온 도선사의 세계에 조선인이 발을 디디려 하자 이를 막으려고 일본인들은 유씨의 응시를 여러 차례 방해했다고 전해진다. 그래도 그는 여러 번 도전 끝에 도선사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광복과 더불어 일본인 도선사들이 돌아간 뒤 혼자서 인천항에서 도선사로 일하다가 49년 인천항에 취업한 김선덕 도선사와 같이 2명이 일했다. 당시 도선사의 근무 조건은 좋지 않았다. 김선덕 도선사는 57년 11월 22일 한밤중에 출항 선박을 안내한 뒤 다른 배를 타고 돌아오다가 기상 악화로 배가 난파되는 바람에 조난을 당해 목숨을 잃었다.

 유항렬 도선사는 1947년 구호물자를 실은 미국 화물선 리퍼블릭호(2만5000t)와 군함 등 50척으로 이뤄진 선단을 안전하게 도선한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꼽았다고 한다.

 6·25전쟁이 터지면서 인천상륙작전 때 유엔군 함정을 안내했고, 1·4후퇴 때는 인천항에서 철수하는 유엔군 군함들을 마지막까지 도선한 뒤에야 피란길에 올랐다. 정년퇴직할 때까지 30년간 선박 3000여 척을 안내했다.

 그는 63년 4월 일본 고베(神戶)에서 열린 아시아지역 파일럿(pilot)회의 창립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아시아에서 활약하는 도선사들의 첫 국제회의였다.

 유 도선사는 일제시대와 광복, 전쟁 등 숱한 사회변화를 겪으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도선사로서의 임무에 최선을 다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항해사·기관사·통신사들의 모임인 한국해기사협회는 부산 태종대에 있는 ‘해기사 명예의 전당’에 2009년 그의 흉상을 세우고 공로를 기리고 있다.

부산=김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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